숲에 무지개가 내리다.

 

낯선 곳을 향하는 길은 설렘과 두려움이 깃든다.
새로운 인연을 만나는 느낌도 이런 걸까.

새크라멘토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카메론 팍Cameron Park이라는 작은 도시로 향했다. 오래전부터 친구인 Joe가 같이 가자고 했는데 일하느라 엄두를 내지 못 하다가 2박3일 여정으로 길을 나섰다. 큰 언니와 그의 아버지가 동행이 되어 L. A에서 8시간 정도 달려가는 길이다. Joe는 전직이 의심 갈 정도로 여행가이드처럼 지루하지 않게 중간 중간 지나치는 도시나 건물 등에 대해 설명을 했다. 나파 밸리의 양쪽으로 끝을 알 수 없이 펼쳐진 포도밭은 진풍경이다.
노을을 마주보고 목적지에 도착을 했다. 커다란 게이트가 낯선 이들의 발길을 막았다. Joe가 비밀번호를 누르며 ‘오픈 세서미’하니까 문은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아스팔트는 아니지만 잘 다듬어져 편안한 길을 따라 꼬불꼬불 들어갔다. 각기 집들이 5에이커씩의 땅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말을 열 마리 이상 키우는 목장도 있었고, 소도 보이는 등 독특한 전원주택들이 넓은 간격을 유지한 채 띄엄띄엄 서 있었다. 영화의 한 장면 같은 풍경들이 눈앞에 펼쳐지며 느긋함과 여유로움이 살포시 열린 창을 통해 우리를 기웃거리자 왠지 살짝 주눅이 들었다.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어서일까.
나무 울타리로 멋을 낸 집. 말발굽 모양의 드라이브 길을 중심으로 커다란 활엽수들이 양쪽으로 늘어서 있었다. 현관문 앞에는 미리 연락을 받은 Joe의 누나 엘리노Eleanor와 그녀의 아들 스텐리Stanly가 우리를 반겨 주었다. 차 안에 오래 앉아 있어서 그랬는지 무릎이 잘 펴지지 않는 다리를 무겁게 끌고 집에 들어갔다. 부엌에서 흘러나온 맛있는 냄새에 누군가의 배에서 꼬르륵 신호를 보내며 맞장구를 쳤다. 허기진 배를 채우고 간단히 짐을 부리며 집 구경을 했다. 높다란 천정으로 시원해 보이는 집안에는 방4개 화장실3개 부엌과 거실 그리고 훼밀리 룸이 있었다. 수녀였다가 지금은 간호사를 은퇴한 후, 장애아동들을 돌보는 봉사를 한다. 그녀의 성격답게 깔끔하고 단정하게 꾸며졌다.
거실의 한쪽 전면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 밖의 풍경이 그대로 보였다. 잔디가 깔린 넓은 뒤뜰에는 아담한 수영장이 자리 잡았다. 한 쪽에 어른 네 명이 둘러야 될 정도로 아름이 굵은 오래된 나무가 집의 중심을 잡아 주려는 듯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나무들이 그 집의 영역을 표시하려는 듯 양쪽에 있고, 언덕과 연결 된 한 면에는 통나무 울타리가 있었다. 나무들은 옆집과의 소음이나 프라이버시를 지켜 주기위해, 통나무 울타리는 야생의 동물들이 밤에 수영장에 와서 물을 먹는데 불편함이 없게 하기 위해서란다. 마치 어릴 적 보았던 TV외화 시리즈 ‘초원위의 집’에 나오는 풍경에 내가 쏘옥 심겨진 느낌이다. 도시의 복잡한 소음 속에서 헤어나 자연과 어우러진 한가로운 곳에 있으니 마음까지 평화롭다. 공기를 깊이 들이 마셔본다. 좋기는 한데 낯설다. 아니 익숙하지가 않아서일까.

그래 그는 공기같이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 나에게 다가왔다. 어쩌다 여럿이 만나면 영어 발음이 틀리다고 지적했다. 몇 번이라도 교정해 주려고 해 자존심이 상했다. 그때마다 돈 안들이고 독선생을 두었다는 생각에 꾹 참았다. 그의 두 여자 친구를 소개 받았을 때, 나도 그들처럼, 아니 미국사람들처럼 이성이지만 동성 같은 친구 하나쯤 주위에 있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는 멋을 부려 보았다. 이혼한 지 20년 가까이 독신을 고집하는 그였기에 신빙성이 있었다.

 벽난로 앞에 모여 앉았다. 와인을 한잔씩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몰랐다. 벽난로와 와인은 사람을 느슨하게 풀어지게 만든다. 그가 이 집으로 나를 데려온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는 친구사이니까. 편하게 휴가를 같이 즐기기 위해서인가. 친구라고 그어진 선을 넘고 싶어 자신의 노후 설계를 은근히 우회해서 보여 주는 것인가. 아직은 때가 아니다.
아침에 지저귀는 새들의 인사를 받으며 잠에서 깨어났다. 다른 이들은 벌써 일어나 대왕나무 밑에 놓인 의자에서 따끈한 커피를 즐기고 있었다. 기지개를 켜며 현관문을 열고 새콤 쌉싸름한 아침공기를 깊숙이 들여 마셔본다. 그래 바로 이 맛이야, 자연의 맛은. 목젖에 걸려 내려가지도 내뱉지도 못해 나를 괴롭히던 그 무언가가 쑤욱 내려가는 기분이 든다.
아침식사를 하고 소화도 시킬 겸 집을 한 바퀴 돌려는데 Joe가 갑자기 ‘쉿’하며 조용히 하라는 동작을 취했다. 가리키는 곳을 보니 울타리 안쪽으로 야생 칠면조 여러 마리가 무리지어 걸어가고 있었다. 아마 일가족이 나들이를 나왔나보다.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으려 부스럭대는 내 욕심 때문에 순식간에 숲속으로 모두 숨어 버렸다.

한동안 알고 지내던 모두로부터 연락을 끊고 숨어 지내던 때가 있었다. 아니 사람이 제일 무섭다는 것을 실감했다. 이혼이 죄는 아는데 사람들의 입에 어떤 형태로든 내 이야기가 오르내리는 것도, 바람결에 들리는 소리도 싫었기 때문이다. 열심히 살다보면 좋은 날이 오겠지 하는 심정으로.

오후에 인디언 카지노로 향하는데 이슬비가 내렸다. 도중에 소나기가 내리고 개이기를 반복하더니 앞에 무지개가 떠올랐다. 누가 먼저 랄 것도 없이 모두 감탄을 했다. 그런데 하나도 아니고 둘이다. 쌍무지개가 뜬 것이다. 가는 동안 내내 우리가 무지개를 쫒아가는 것인지 무지개가 우리를 부르는 것인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여행길이어서인지 나이를 잊고 모두들 들떴다.
나의 제안으로 꿈에 대해 말하게 되었다. Joe는 4년 후 은퇴를 하면 노후를 이 집에서 자연과 벗하며 살고, 그동안 못 가본 곳으로 여행을 다닐 것이란다. 칠십이 넘은 누나는 멕시코의 산 펠리페 San Felipe에 있는 집에 내려가 살고 싶으니 동생에게 빨리 은퇴하고 올라오란다.
그의 아버지는 간단했다. 구십이 내년이니 그저 건강하게 자신이 좋아하는 카지노에서 도박을 즐기는 것이다. 언니는 이곳에 테리야키 식당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데 하며 혹시 기회가 되면 그녀의 요리솜씨를 발휘해 볼 사업에의 꿈을 그렸다. 나는 두 아이들이 학교를 마치고 자신들의 삶을 성공적으로 꾸려나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이 전부일까. 나의 진정한 꿈은 무엇인가. 엄마로써의 바람과 여자로 누리고 싶은 행복, 아니 한 인간으로 태어나 후회 없이 살다가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언덕 너머 걸려 있는 일곱 빛깔 무지개보다 더 여러 갈래 질문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차가 멀어질수록 무지개는 나직하게 내려오기 시작했다. 마침내 무지개는 숲이 우거진 언덕에 걸렸다. 하늘에 있던 무지개가 내가 지나온 숲길에 다리를 만든 것이다. 그 변화는 신비로우면서 무언가를 예감해주는 듯 했다. 날이 완전히 개여 무지개는 슬그머니 사라졌지만 내 영상 속에서는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상상의 나래들이 다른 꿈을 안고 저 하늘을 나는데 어느새 카지노의 번쩍이는 간판이 우리를 맞았다. Joe의 아버지가 제일 반가와 하며 서둘러 내렸다. 그 연세에 어디서 저런 힘이 나올까. Joe의 누나가 건강이 최고의 행복이라고 해서 모두 동의했다. 번쩍이는 불빛과 슬럿 머신에서 나오는 음악소리에 우리의 꿈은 잠시 뒷전으로 몰아 놓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주머니가 가벼워지자 허기가 들었다. 이제 인디언들에게 그만 도네이션하고 밥 먹으러 가자고 졸랐다. 저녁밥값은 남겼겠지.
참, 그 쌍무지개는 언니의 품안으로 숨어 들었었나보다. 카지노 문을 나서며 마지막을 강조고 누른 기계에서 1000불이 터졌다. 언니가 인심 좋게 모두에게 나눠 주었다.

쌍무지개야!
나에게는 어떤 행운을 안겨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