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피워낸 꽃
오늘도 햇볕이 뜨겁습니다. 6월의 태양은 모든 것을 태워 그 안의 불순물을 없이 하고 새로운 창조물을 만들어내려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가장 순수한 모습을 띄우는 때는 언제일까요.
막 태어난 아기의 웃음 만큼 꾸밈 없는 표정은 없을 것 같아요. 새벽 잔디 이슬 위에 핀 작은 들꽃을 닮았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성숙해 가면서 세상 속에서 자기만의 색깔과 특성을 채우며 또다른 모습으로 변해 갈 겁니다. 더욱 멋진 꽃이 되겠지요.
일반 병원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소독약 냄새도 강하게 풍기지 않았고 환자들의 신음소리도 크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치매 진단을 받은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들도 이곳에 머물기 전까지는 그저 평범한 사회인, 가족, 친구였을 것입니다. 지금은 세상이 만들어 놓은 규정이나 판단 기준과 상관없이 각자의 세계 안에서 나름 평안한 삶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큰언니가 이곳에 있습니다. 열 두 살이 많은 띠동갑 언니, 나는 막내 동생.
어려서부터 롤 모델이었던 언니는 이젠 자신만의 세상에서 하루하루를 서성이며 지냅니다. ‘생활’보다는 ‘생존’이라는 말이 적절해 보입니다. 두 해 전부터 서서히 기억이 망가져 가더니 누군가의 도움이 아니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만큼 된 거죠.
롱 텀 케어라 합니다. 그야말로 오랜 시간 돌보아 준다는 병원, 그것의 끝은 아마도 언니 생의 마지막 시간이 될 것입니다.
나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질서있는 대화를 이어갈 수 없습니다. 일류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고 한국을 떠날 때까지 20여 년을 교직에 있었죠. 내가 언니의 동생이라며 계속 이름을 말해 주었습니다. 간간히 내 이름을 불러주네요. 예쁘다고도 말해 주었습니다. 말하는 동안의 익숙한 작은 동작들은 오랫동안 봐 왔던 큰언니가 틀림없는데 그녀는 거기에 없었습니다. 잠겨져 있는 병동에서 스스로 삶을 관리할 수 없는 환자일 뿐입니다. 마음이 무너져 내립니다.
누군가가 기억은 사랑으로 만들어진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각가지 모양의 꽃이죠.
우리의 삶이 사랑으로 채워지고 있음이 분명한 것은 누구나 자기의 모습대로 피워 낸 향기를 뿜어내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화려함을 자랑할 수도 있겠죠. 그보다는 크고 작음이 비교되지 않고 서로 다른 꽃으로 어우러져 예쁜 세상을 만든다면 모두가 행복할 것입니다.
오늘까지 내 사랑의 기억을 쌓아 피워 낸 꽃이 큰언니 곁에서 친구가 될 수 있다면 기꺼이 내어주겠습니다.
영원한 꽃은 없습니다. 생의 흐름을 따라 청춘의 정점을 찍고나면 화려했던 꽃잎을 떨구고 허세를 벗어난 순수함을 자아내게 됩니다. 한때의 정열을 기억하며 가슴 속 사랑의 높이를 키워 가지요. 우리 함께 향기 품은 꽃으로 키를 다투며 좋은 세상의 친구로 살아가기를 꿈꿔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