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바다

 

나는 선생님이다.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책상에 줄지어 앉아 교탁 앞에 내게 주목하고 있다. 모두가 집중하여 눈을 맞춘다. 햇살은 칠판에 쓰여진 학습내용을 비추며 새로운 지식을 건네주는 목소리를 낭랑하게 밝혀준다. 알아들은 듯한 여유로운 표정과 아직 이해하지 못한 미완의 눈빛이 엇갈린다. 교단에 앳된 여교사는 자기가 알고있는 모두를 가르쳐 주려는 지치지 않는다. 시간의 강을 뛰어 넘어 교실의 풍경 속에 빠져들고있다.

내가 교편생활을 때에는 그래도 낭만이 있었다. 교직의 권위가 지켜졌던 시절이었고 학생들은 선생님의 말을 따라 주었다. 요즈음처럼 교사들의 집단행동이나 자식이 야단 맞았다는 이유로 교사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학부형은 없었다. 새학기가 되면 아이들은 다른 학급과 경쟁하듯 담임교사의 책상 위에 예쁜 주전자와 물컵을 담은 쟁반을 마련했다. 아침이면 당번을 정해 작은 꽃병의 꽃을 올려 주었다. 어느 해의 것인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오래된 플라스틱 쟁반 하나를 아직도 갖고 있다.

지난 주에 작은 교통사고를 당했다. 비가 살짝 뿌린 오후 내리막길 신호등 앞에 정차해 있던 나를 뒷차가 받은 것이다. 눈에  띄는 차의 손상은 없었지만 넋 놓고 파란 신호를 기다리던 나는 순간적으로 목이 젖혀지며 놀랐다. 뒷자리에 웅크리고 잠들었던 우리 개도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이후 나는 카이로프래틱에 점검을 받으러 갔다. 엑스레이를 찍고 몸상태를 체크하던 닥터 김은 이름과 모습이 왠지 낯설지 않다며 말을 걸었다. 아마도 몇달 딸아이도 물리치료를 받으러 다닌 것을 기억하기에 비슷한 인상 때문이라 생각했다. 치료를 받고 집에서 해야할 처치법을 들었다.

어떤 분야든 내가 전혀 모르는 방면에 전문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을 존경한다. 그의 말을 무조건 믿고 따르며 시키는대로 행동하는 편이다. 하루 이틀 치료를 받노라니 내게 따라주어 고맙다 한다. 끝에 나는 선생님이고 잘듣는 학생이 제일 예쁘더라며 웃었다. 자연스럽게 한국에서의 교사였음을 얘기하다 보니 닥터 김이 바로 내가 근무했던 학교엘 다녔던 것이다. 그가 졸업을 하지 못하고 미국으로 같은 해에 나도 학교를 떠나 미국에 것이다. 정말 세상은 좁다. 그는 나를 안으며 반가와 했다. 내일은 졸업앨범을 들고 오겠단다. 우리는 32 전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아이의 엄마가 제자와 손주를 할머니가 스승의 해후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멀었다. 마일 밖에 떨어지지 않은 거리였는데 그만큼의 시간을 기억의 바닷속에서 건져내고 있었다. 상사 주재원으로 발령 받은 남편을 따라 아이를 데리고 뉴욕에 다달았을 나는 스물 여덟의 젊은이였다. 그보다 시간을 미국에 뿌리 내리며 이제 땅에 묻힐 마음이 만큼 한국을 잊고 살았나 보다. 생존을 위해 패스트 푸드 가게를 11년이나 지켜왔고 우체부로도 일했다. 중노동으로 건강이 망가져 비영리 단체에서 마지막 직장 생활을 마감했다.
교직이 아닌 다른 일들을 오랫동안 해 왔지만 내가 선생님이라는 생각을 품고 살았다. 아줌마, 미세스 , 또는 할머니 등의 호칭은 거북했고 선생님이라 불리우면 편안했다. 아마도 머물렀던 다른 시간이 정녕 내가 바라던 바가 아닌 어쩔 없는 생존의 수단이었던 까닭일 테다. 주말한국학교에서 모국어와 한국문화를 가르치던 10 년의 기회를 충실히 지킬 있었던 것도 속에 깃든 교직본성 때문이었음이다.

누구나 좋은 일들을 오래 기억하고 싶으리라. 바람처럼 낙엽처럼 수 없는 기억들을 흘려 버렸지만 붙잡아 간직하고 싶은 시절이 그리운 것은 가장 열심히 살았던 흔적 때문이 아닐까. 내겐 선생님 시절이 가장 귀하게 새긴 시간으로 남겨져 있다. 외로웠던 내게 남편이 생겼고 아기들도 낳았고 혼자가 아니었다.
이제 그렇게 열심히 달려가던 길에서 휴식을 갖는다. 목적지에 가까이 있기에 지금까지처럼 속력을 필요가 없다지나온 길을 찬찬히 돌아보며 행복했던 순간들을 떠올리고 무겁던 마음도 되돌아본다. 모두가 소중한 자국들이다.
나는 선생님이다. 이젠 출석부 대신 컴퓨터가, 칠판 자리에 스크린이 있지만 스승과 학생의 관계는 변할 없다. 지금 뒤에 칠판이 없어도 앉아있는 학생들이 보이지 않아도 바른 자세로 올바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다시 선생님이라 불리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