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메아리
멀리서 들려오던 종소리를 기억한다. 어릴 적 살던 동네 가까운 언덕에는 교회가, 조금 떨어진 곳엔 성당이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을 넘을 때면 두 개의 다른 종소리를 듣곤 했다. 높고 청명한 교회 종소리와 긴 여운을 남기며 낮게 울리던 성당의 종소리는 고단한 하루를 품어 흐르는 시간 속으로 묻어버렸다. 끼니때를 모르고 고무줄놀이에 빠져있던 아이들도 저녁 먹으라는 엄마의 목소리와 함께 흩어져 갔다.
아마 새벽 시간에도 같은 종소리가 울렸을 것이다. 모두가 잠든 시간에 하루의 시작을 일러주는 그 소리는 더욱 크게 멀리까지 퍼지지 않았을까. 엄마는 새벽마다 성당의 미사를 다녀오시곤 했다. 무엇을 기도하고 계셨을까. 가족들의 건강과 행복, 세상에 내어놓은 네 딸이 걸어갈 길을 신에게 맡기는 애절한 마음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산다는 것의 의미나 행복 찾기 보다는 생존의 문제에 짓눌려 고뇌하며 평생을 사셨을 엄마의 삶이다. 지금은 천상에서 편안하실까.
올해 내 나이 환갑이 되었다. 생각하지도 않았던 잔치를 딸들이 만들어 주었다. 기쁨을 나누고 싶은 친구들을 초대하라는 당부도 했다. 누구와 마주하면 좋을까. 많은 생각이 스쳤다. 어쩌면 지금까지 살아온 내 삶이 만든 인간관계의 그림이 드러나는 대목이리라. 살아오면서 참으로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중에서도 마음을 열어 보일 수 있는 진실한 사람들을 떠올렸다. 알고 지낸다 해서 모두가 따뜻한 것 만은 아니었다. 체면상의 만남도 있었고 은혜 갚음을 위한 관계유지도 중요했다. 아무 때 어디에서 마주쳐도 반가운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냥 편안한 사람들, 내 허물을 지나쳐 줄 수 있는 인생의 동행들이다.
산꼭대기에 있는 레스토랑을 예약했다. 꽃과 풍선으로 장식하고 어디서 찾아내었는지 내 어릴 적부터 자라온 모습의 사진들을 엮어 슬라이드 쇼도 마련했다. 오십 살이 되었을 때 평생 즐겨 부른 노래를 모아 한 장의 CD로 만든 것이 있다. 딸들은 뜻도 모르는 내 노래를 잔치의 배경음악으로 깔아주는 세심한 배려까지 해 주었다. 이젠 내가 아이들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내가 기대고 있음이다. 아마도 아비가 곁에 있었다면 훨씬 가벼운 마음으로 기뻐해 주었을 것을. 내 환갑까지는 살아주겠노라며 힘든 투병을 하던 남편의 애틋한 눈길이 서럽도록 보고 싶다.
삶의 저녁 종소리를 듣는다. 어릴 적 그때의 교회와 성당은 어찌 되었는지 모르지만, 마음으로 듣는 종소리는 달라지지 않았다. 오늘 밤이 기울고 내일은 해가 다시 떠오를 테지만, 언젠가 영원히 잠들어야 할 마음을 내려놓을 수 없다. 짧지 않은 육십 년의 시간 속에서 나는 무엇을 바라보고 달려왔는가. 때론 내가 세상에 온 이유가 궁금하기도 했다. 많은 나날을 눈에 보이는 것만 좇아 허둥대며 지나왔다. 남은 날 동안의 마무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내 생애보다 더 중요하고 힘든 과제가 될 것이다.
날로 새로워지는 의술이 생명의 끈을 길게 만든다. 병든 육신으로부터 해방되는 자유와 의지마저 외면당하기도 한다. 기록으로 만들어놓을 계획이다. 생명보조 장치 같은 것은 일절 사양하겠노라고. 육체적이건 정신적이건 간에 스스로 판단력을 잃게 될 때를 대비하는 내 바람이다. 온갖 의료장치들로 옭아맨 병상에서의 마지막 아버지 모습이 죽음만 못한 치욕이라고 느꼈던 기억 때문이다. 거기에서 인간생명의 존엄성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나이가 들면서 아침잠이 없어졌다. 새벽 종소리 대신 새들의 노래를 듣는다. 엄마 새, 아빠 새, 남편 새가 내게 말을 걸어온다. 마치 새로운 오늘, 또 하루의 꿈을 꾸라고 말하는 것 같다. 삶의 무게에 지친 나에게 마음의 창문을 두드리는 이들이 있어 한결 가벼운 새날을 맞는다.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들의 미소에서 새 힘을 얻는다.
내일을 위한 기도를 드린다. 모든 세상 것들로부터 벗어나 하늘 가까이 닿고 싶다. 무한히 펼쳐진 고요의 세계로 날아들고 싶다. 이기심도 미움도 없는 평화가 숨 쉬는 곳에 머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옛날 무릎 꿇어 간절히 기도하던 엄마의 마음을 닮기로 했다. 가난한 마음으로 내가 작아지기까지 두 손 모은다. 따뜻한 기운이 가슴에 번진다. 기억 속 종소리가 메아리 되어 멀리멀리 퍼져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