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꽃우정                                                                                                                           

토요일의 아침은 한가롭다. 이른 시간 벨소리에 문을 여니 감나무 한 그루가 배달되어 왔다. 그 날은 나의 쉰 일곱 살 생일이었다. 성당에서 만난 동갑내기 친구가 보낸 것이다. 언젠가 그녀와 얘기를 나누던 중 먼저 살던 집에서 감나무 열매를 못맺은 것이 안타까웠다는 말을 흘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감나무'라고 들었으니 그런가보다 하였지 잎사귀 하나 없는 민가지 뿐이었다. 여름이 되어야 잎이 난다나.

 

이 집으로 이사온 뒤 가장 아쉬웠던 것이 마당 가꾸기였다. 날씨의 변화에 따라 꽃씨도 뿌리고 나무도 심으려는데 땅이 척박하기가 이를 데 없어 지난 일 년 동안은 흙에다 온 정성을 쏟았다. 

나는 과일나무 심기를 좋아한다. 꽃을 피울 때엔 그윽한 향기로 미소짓게 하고, 여름 태양 아래 푸른 잎 가지는 쉼그늘이 되어주고, 단내 품은 열매는 보는 이들의 마음 마저 부유케 하는 듯 하다.

 

나이 오십 중반을 넘기고 만난 친구. 실은 그녀와 얘기를 처음 나눈 것이 채 일 년도 되지 않았다. 남편이 유태인이어서 오랫동안 한국인들과의 교류가 없었고 더우기 여러 해를 신앙생활에서 떠나 있었단다. 그러던 중 마음의 움직임이 있어 성탄 즈음에 집에서 가까운 우리 성당을 찾게 되었다. 친교 시간 중 우연히 한 테이블에 마주 앉았던 어느 날 이후 우리는 서로가 삶의 목마름을 달래주는 역할에 익숙하게 되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수 없는 사람들과 마주쳤다. 때론 한국에서라면 만나지 않았을 이들 마저 상대해야 했었다. 그중엔 세상적인 인연으로만 이어지고 있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소중하게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동지도 있다. 얼마나 귀한 만남인가. 비슷한 사고와 행동양식을 바탕으로 우리는 끝까지 아름답게 불려지고픈 이름이 되려 노력한다. 세월의 그늘 속에서 고단했던 삶의 부스러기들을 추스리고 바로 세우며 서로를 격려하고 일깨운다. 

 

늦가을 되어 잎사귀 다 떨군 가지에 주렁주렁 매달릴 황금열매를 꿈꾸며 감나무를 심었다. 구덩이를 파다 보니 주변 나무의 잔뿌리들이 땅속 깊이 엉켜있다. 간간히 크고작은 돌들도 끼어있다. 마치 나의 삶 속에 가려져 있는 온갖 고뇌와 슬픔들, 아름다운 추억같이 보이진 않아도 나를 지탱해 주고 있는 영양분처럼 제자리를 충실히 지키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나의 하루를 끌어간다고 생각하니 짧은 순간도 결코 헛되이 흘릴 수가 없겠다. 오늘도 열심히 살아야지.  

정성껏 친구의 사랑도 함께 심었다. 땅속에서 깊이 뿌리 내리고 햇빛과 비를 흠뻑 머금어 잘 자라기를 소원하였다. 다음 해, 또 그 다음, 언젠가 가지가 휘어져 내릴 만큼 풍성한 감 열매 아래서 친구와 마주보며 지난 얘기, 가슴 저미던 슬픈 기억들도 나누어 보리라. 

   

삶의 저녁 무렵에 이르렀다. 이제 저 영원한 새벽을 맞을 때까지 그리운 마음 한자락 졉으며 그래도 못다한 말들을  새겨 보아야겠다. 

오늘따라 쏟아져 내리는 햇살이 어머니 손길처럼 따사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