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빗물
사막에서 비를 만났다. 그냥 주룩주룩 내리는 물 줄기가 아니라 쏟아 붓는 듯한 소나기였다. 여행사 직원은 3년 가이드 생활에서 처음이라며 놀라워 했다. 학교에서 배운 대로라면 사막은 가도가도 끝 없는 모래 벌판과 뜨거운 태양이 내리 쬐어야 한다. 낙타가 생각나고 아라비안 대상이 그려지기도 한다. 사막에서 물을 만난다는 것은 새로운 생명을 부여 받는 신성한 의식일 수도 있다.
미사 전례를 맡고 있어 주일을 빠진다는 것이 쉽지 않다. 모처럼 주중을 이용한 2박3일의 짧은 여행으로 지구 상에서 가장 기(氣)의 흐름이 왕성하다는 '세도나'에 다녀왔다.
조금씩 비가 흩 뿌리는 월요일 이른 아침 버스가 출발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관광회사를 이용한 여행이다. 지금까지 웬만한 곳은 자동차로 운전하며 다니기를 좋아했다. 짜여진 일정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관광보다 여유롭게 이곳 저곳을 살펴볼 수 있는 재미가 더한 때문이다.
55인승의 커다란 버스는 편안하였다. 달리는 차에 몸을 맡기고 차창에 스치는 풍광을 눈에 들어오는 대로 즐길 수 있어 좋다. 엘에이를 벗어 나면서 가이드는 자신의 의무를 이행하느라 쉬지 않고 무언가를 얘기한다. 내겐 별로 흥미가 없는 내용 같기에 아예 귀를 막고 내 안의 세계로 빠져든다.
계절의 변화는 어길 수가 없나 보다. 가을이 온 세상에 얼룩 자락을 깔아 놓았다. 아직 나뭇잎이 간간히 푸른 기운을 띄고 있긴하지만 그것은 봄날의 여린 초록이거나 속으로부터 뿜어 오를 것 같은 여름날의 푸프름과는 많이
달랐다.내달음 치던 시간을 뒤로 하고 지켜온 날들을 채색하는 단아함이 느껴진다. 내 삶도 이쯤 가을 언저리에 자리하고 있는 걸까.
남한 면적의 반이 넘는 광대한 모하비 사막을 지난다. 곳곳에 바람이 만들어 놓은 모래 언덕들, 그 안에서 끈질긴 생명으로 자라는 사막의 풀들이 황폐한 내 마음 속 희망과 겹쳐지며 오묘한 형상으로 다가온다.
한참 달려 작은 도시를 만났다. 그 옛날 위용을 자랑하던 콜로라도 강의 모천을 끼고 생겨난 작은 위락 도시인 라플린이다. 미국 최대의 인공 호수인 후버댐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콜로라도 강은 물살이 매우 거세고 수량도 많아 주변에 큰 피해를 주었다. 우리가 흥얼거리며 부르던 '콜로라도의 달밝은 밤'처럼 낭만과는 거리가 먼 강이었다. 이제는 사람에 의해 고분고분하게 통제되어 가느다란 물줄기 만을 흘려 보내고 있었다.
세도나가 눈 앞에 보인다. 해발 4500피트 높이에 위치한 온갖 붉은색의 기이한 형상의 사암들,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바위가 있고 많은 명상가와 예술인이 찾는 곳이다. 그냥 바라다 봄 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해짐에 관광객 중 누구 하나 도 감히 시끄러울 수 없는 엄숙함을 유지한다.
꼭대기에 위치한 홀리 크로스 성당에서 무릎을 꿇었다. 촛불을 붙여 모든 영혼을 봉헌한다. 나와 손잡았던 인연들을 하나하나 기억하며 떠난 이들에겐 영혼의 안식을, 남은 이들을 위해서는 평화를 기도했다.
돌아 오는 사막에도 비가 내렸다. 도시의 빗물과는 느낌이 달랐다. 포장된 도로 위에 부딪혀 수로를 따라 흘러드는 물줄기가 아닌 소리 조차 내지 않고 주어진 자리에 그대로 젖어드는 순응이랄까. 욕심도 경쟁심도 보이지 않았다.
사막과 같은 광야의 삶, 이것이 내가 걸어야 할 길임을 다시 깨닫는 여행이다. 한낮의 뜨거움과 모진 밤바람을 매일처럼 겪으며 암석은 부서져 모래알로 남는다. 우리의 생애도 굽히지 않고 꺾일 줄 모르던 젊은 날들을 지나 모래처럼 부드러워지고 어느 새 바람에 몸을 맡긴다. 알 수 없는 저 영원으로부터 찾아와 머물다 어느 날엔 희미한 자국만 남긴 채 사라진다, 살아 있는 이들에게는 곧 잊혀지고 말 존재일 뿐. 쓸쓸함이 느껴지는 마른 땅에 비가 스미고 나면 다시금 사막은 드러날 것이다. 어쩌다 적셔주는 비 마저 없었다면 우리는 무엇을 기대하며 살 수 있었을까. 오늘도 그 비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