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모습

복숭아꽃이 스러져간다. 목련이 때쯤 연분홍 꽃망울을 터뜨려 봄빛 날개를 붙여준다. 알알이 작은 소망의 열매를 달아준 다음 시든 꽃잎으로 사뿐히 흩어져간다. 떠날 때를 아는 듯하다. 마르는 꽃잎에서 가난한 수도자의 모습을 본다.

 

집으로 이사 건물 가까운 곳에 나무를 두는 것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오래된 나무를 잘라내었다. 옆집 백인 할머니는 나와 마주칠 때마다 자리가 너무 허전하다며 나무를 심으라고 성화였다. 전에는 나무로 이웃과 우리 집이 함께 어우러져 보기에도 편안하고 담장을 가릴 있어 보안에도 도움이 되었다.


나는 일본 종자의 복숭아나무를 심었다. 이듬해부터 열매를 맺기 시작하였으니 올해로 년째가 된다. 보송보송한 털을 씻어내고 모시 적삼같이 얇은 껍질을 벗기면 하얀 속살이 갓난 아기의 볼처럼 부드럽다. 수밀도를 무척 좋아하시던 엄마 생각이 난다어린 내게는 물컹거리는 과실의 느낌이 싫었지만, 엄마는 자주 백도를 사오곤 하셨다. 나도 나이가 들면서 딱딱한 과육보다 주스가 많은 것들을 즐긴다.  


특별한 영양관리를 해주지 않는데 나무는 자라고 해마다 가지가 휘어지게 열매를 매달곤 한다. 또한 세상 최고의 부드럽고 것이 어느 마켙에서도 찾을 없다. 많이 열리긴 하지만 크기가 작은 것이 아쉬웠다.

농업 부문에 상식이 없었던지라 열매가 매달리면 적당히 솎아주어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 오늘은 가지마다 빈틈없이 달린 꼬마 복숭아들을 따내 주는 작업을 하였다. 보통은 개의 복숭아가 맺혀 있고 어느 가지 끝에는 서너 개의 열매들이 서로 몸을 부딪치고 있다. 하나만을 남기고 따내노라니 마음 한편으로 아까운 생각이 든다. 그대로 둔다면 모두가 각각의 복숭아로 자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것보다는 작은 것을, 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을 골라 따내 주었다. 땅에 던져진 열매들은 썩어져 거름이 것이다.

  

내게도 어린 싹처럼 희망에 부풀었던 시절이 있었다. 꽃향기와 푸른 잎의 청춘, 열매  맺음의 세월도 지나왔다때론 것을 위해 사소한 것들을 포기해야 했고 힘든 것을 피하려 눈가림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내가 옳다고 여긴 것들을 지켜내느라 힘든 시간도 있었고 실망하며 맥빠진 나날도 많았다. 열매들을 거두는 얼마큼 탐스렇고 건강한 것들을 내어놓을 있을는지 모르겠다. 하나의 과실을 맺는다 해도 마음을 다해 정성을 기울였다면 후회는 없을 것이다. 가장 소중한 하나를 위해 곁에 머물러 있었던 많은 것들을 버려야 때도 있었다. 너무 아까워 놓지 못했던 , 애써 일구느라 바친 정열, 기대하고 참아왔던 고통의 시간을 솎아내고 싶다

  

제때에 떠나감이란 쾌적하고 말끔한 느낌을 준다. 유명한 스타들이 아직 활동할 있는 나이임에도 과감히 은퇴를 선언하고 아름다운 삶을 즐기는 모습은 정말 멋지다. 일찍이 거두어놓은 열매들을 어려운 이웃과 나누는 이들이 있어 아직도 세상은  따뜻한가 보다. 어느 시인이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노래한 이유를 깨닫는다.

삶의 공연이 끝난 감동의 박수와 함께 퇴장할 있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