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는 은행나무 / 정계순 - 2025 경북이야기보따리수기공모전 입선

 

 

겨우내 긴 잠에서 깨어난 은행나무 새순은 눈이 시릴 만큼 상큼하다. 은행나무의 거친 수피에 손을 가만히 대어 본다. 군데군데 이끼가 덮여 있지만, 나무의 피부는 생각보다 건조하다. 주변은 온통 지난해의 잎들로 가득이다. 말을 들어준다는, 말하는 은행나무다.

 

키는 아파트 10층쯤, 가슴둘레는 어른 서넛 팔을 뻗어야 닿는 아름드리다. 곧게 선 줄기는 밑동에서부터 오른쪽으로 뒤틀리면서 균형 있게 곧추 자랐다. 낮게 뻗은 두 가지는 땅으로 굽어 지팡이를 짚었다. 위용이 어찌나 울창한지 가지마다 산신령이 걸터앉아 나를 지켜보는 듯하다.

 

칠곡군 각산리, 일명 퉁지미 마을이라고도 불리는 마을에는 성주에서 시집온 지 3년이 지나도록 애기를 갖지 못하는 새색시가 있었다. 답답하고 울적할 때마다 은행나무를 찾아가 떨어진 잎을 만지작거리며 마음을 달래곤 했단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은행나무가 나타났다. 은행나무는 어머니로 변하더니 따스한 손길로 은행나무 두 잎을 딸에게 전해 주었다. 하나는 갈라진 것, 다른 하나는 갈라지지 않은 은행잎이었다. 그리고 보름달이 뜨는 날, 은행나무로 가서 떨어지는 잎을 잡으라고 말하고는 은행나무로 변해 버렸다. 새색시는 어머니가 알려준 대로 은행나무 아래에서 떨어지는 잎을 잡았다. 잎이 갈라져 있었다고 한다. 이후 새색시는 임신했고, 아들을 낳았다고 전한다.

 

이후 마을 사람들도 은행나무를 찾아가 이런저런 남모를 고민을 털어놓았다. 은행나무는 꿈속에 가장 사랑하는 가족으로 나타나 위로해 주고 조언해 주었다. 그러자 차츰 나만의 고민을 알아봐 주고 어떤 방법으로 답을 말해 준다며 ‘말하는 은행나무’라 불리게 되었단다.

 

갑자기 하늘이 뻥 뚫린다. 난무하는 영기에 흠칫했다. 순간 서늘한 바람이 골짜기를 강하게 스쳤지만, 숲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어떤 향기도 냄새도, 어떤 소리나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처음엔 겁이 났지만, 이내 따스한 눈빛으로 무슨 일인지 물어보는 듯했다. 저 나무가 ‘말하는 은행나무’다. 말뿐만 아니라 긴 가지를 뻗어 나를 포근히 감싸 안는 것처럼 느껴졌다.

휴대용 산소통을 흔들며 남자의 숨소리가 거칠다. 자연으로부터 너무 당연하게 얻어지는 산소를 쉬이 들이켜지 못하는 남편은 만성폐쇄성 폐질환 환자다. 원인도 모르게 어느 날, 의사로부터 진단을 받게 되어 온 가족이 긴장에 빠졌다. 호흡기 질환이라 응급 상황이 가끔 발생한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허덕이는 걸 보면 곁에 있는 내가 숨이 차다.

 

남편은 20여 년 타국에서 기러기로 살았다. 가족을 위해 젊음을 불사르며 산업 현장을 누빈 세월의 흔적이 주는 고통이라 생각하니 몸서리쳐진다. 평생을 가족을 위해 헌신해온 남자, 누구나 당연하게 여기는 호흡이 자유롭지 못하다. 말하는 은행나무에게 두 손 모아 합장하고 간절히 기원했다.

 

저 남자 숨 잘 쉬게 해주소서!

 

돗자리를 깔고 생수 한 병과 사과를 꺼내서 차린다. 넙죽 엎드린다. 남편도 남들처럼 맑은 산소를 마음껏 들이켤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오랜 세월을 따로 살다가 한 공간에 머물게 된 죄밖에 없는데, 가혹한 시련은 거두어달라고 떼를 쓰듯 간청했다. 젊음의 패기와 자신감으로 무장했던 남편이 숨을 마음대로 들이켤 수 없다는 현실을 애써 부정하고 싶다.

 

산소호흡기 없이는 잠시도 외출이 자유롭지 못하다. 현대의학이 발달 되어 있다고 하지만, 남편의 병은 완치될 수는 없다고 한다. 지금보다 더 진행되지 않도록 관리하는 게 치료다. 숨차 오르는 모습을 보면 아내로서 해줄 수 있는 처방이 없다. 탕약도 명약도 듣지 않는데, 나는 그저 어딘가 용하다는 곳이 있다면 잰걸음으로 찾아가 두 손 모아 빌밖에….

 

사람의 힘으로 감당하지 못하는 시련, 사람의 손으로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렸을 때, 누구에게도 말 못 할 고민이 있을 때, 그 절박성으로 인간은 신령스런 힘을 찾는다. 그 바람이 백번 천번일 때 비로소 보이지 않는 힘이 작동한다. 간절함의 힘이리라.

 

사람들이 남긴 돌탑을 본다. 누군가는 꿈에 떨어지는 나뭇잎을 잡았을 것이다. 또 누군가는 꿈에 사랑하는 가족을 만났을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은행나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말하면 들어주는 거다. 살다 보면 다 말하지 못하고 가슴에 묻어야 할 말이 있는데, 말을 안하면 누가 들어주랴.

 

사람들이 답답해하는 일은 어떤 내용인지 궁금하다. 사는 게 비슷하니 비슷하겠지. 자신이 가장 절실하다고 하겠지만 건강보다 더할까? 비밀스런 간절함으로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사연도 은행나무는 소문을 퍼트리지 않고 신령스러운 기운으로 다 들어준다. 가슴에 멍울이 병이 될 것도, 믿고 말할 수 있으니 치유되리라

 

간절함에 희망으로 돌 하나를 집어든다. 돌탑에 돌 한 점 가만히 올려본다. 하나하나의 소원이 속닥거리며 위무하는 느낌이다. 숱한 사연을 어루만지며 그들이 강구 하는 의미도 되새겨 본다. 다양한 갈망이 숨 쉬는 공간이다.

 

은행나무의 기운과 맑은 공기가 시원하다. 남편이 숨을 크게 들이켜고 내뱉기를 반복한다. 푸른 기운이 남편의 호흡을 길게 열어준다. 신령스런 힘이 기운을 북돋으라고 남편의 가슴에 조용히 두 손을 얹는다.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