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창과 절규 사이 / 김원순 - 2025년 고동주 문학상 대상
천산만학이 활활 탄다. 천지가 단풍 불길이다. 등성마루를 타고온 산꼬대가 불길을 더욱 부추긴다. 사방팔방 튀는 불똥이 이곳 남창南窓까지 날아와 불꽃을 터뜨린다. 저수지 물을 다 퍼올려도 끌 수가 없다. 생애 가장 눈부시고 농염한 때, 절정이며 절창이다.
오롯이 물들 때와 날 때, 담담히 머물 때와 떠날 때를 아는 단풍이 지른 불길이다. 지금은 단풍물을 한껏 길어올려야 할 때. 물의 씨앗을 찾아 돌무지나 막장도 파고든다. 돌부리, 나무 뿌리에 걸려 넘어지고 부러져도 개의치 않는다. 절정을 향한 일념으로 목숨까지 내놓은 뿌리가 토해낸 각혈이며 혈루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품었던 거짓, 무시, 비난의 화살에 터져버린 내 심장 빛깔이다. 그래서일까, 단풍 불길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한다. 피 끓는 절창이 애끊는 절규처럼 들린다.
생의 절정도 그저 오지 않는다. 고통, 고난이 단근질할 땐 마음자리를 다잡는 심근心根부터 살펴야 한다. 덫에 갇히고 돛이 찢기고 닻을 내린 뿌리는 곡절과 변명에 귀 기울이고 위무해주고 다독여야 한다. 담쟁이처럼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가야지 절정에 닿는다. 뿌린 대로 거두는 신실한 뿌리를 따라가면 길이, 인생이 보인다.
인생은, 세상이란 준산에 뿌리내려서 꽃과 열매를 매다는 아름답고도 처절한 노역이다. 자만과 욕심에 심근이 잘리면 절정의 때를 놓친다. 꽃과 열매는커녕 잎보다 먼저 단풍 든다. 영혜한 뿌리는 제 탓인 줄 알고 함구하지만, 우매한 뿌리는 온갖 핑계를 댄다. 준산에는 덫이 하 많아서 돛과 닻을 내렸다고 뻘에 처박힌 채 광활한 우주를 누빌 꿈만 꾼다. 꿈에서 깨어나야지 뻘에 박힌 뿌리가 비로소 보인다. 생이 굴곡질수록 뿌리가 깊고 오달지다. 삶의 방향, 속도, 목표를 결정짓는 심근이 꿋꿋한지 찬찬히 톺는다.
속도보다 방향, 영달보다 안분지족을 택하는 뿌리가 인생의 때를 번번이 놓치는 내 심근을 툭툭, 친다. 준산에 뿌리내리려면 숨 참는 법부터 배우라는 죽비다. 수백 년을 한결같이 제자리를 지켜온 노거수들의 생존법이다. 참았던 숨을 절정에 토하는 단풍을 보면, 속도와 영달에 멀었던 눈과 귀가 번쩍 뜨인다. 심안과 심이가 있어야 때를 아는 단풍처럼 인생의 절정을 만끽할 수 있다.
생의 나날은 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뿌리들의 혈투판이다. 상대의 뿌리를 뽑거나 잘라야지 산다. 가진 것을 나누기보다 곱하고 빼기보다 더한다. 이해타산에 혈안이 되면 목숨도 불사한다. 더불어 사는 뿌리의 도道와 선宣을 모른 탓이다. 생의 희비는 심근에 달렸다. 심근의 인욕忍辱 정도에 따라 절창이나 절규가 된다.
단풍잎에 새겨진 갖은 풍상을 읽는다. 처연하다못해 처절하다. 주름진 잎맥 사이로 선혈이 낭자하다. 묻거나 번지거나 지워지지 않는 선혈. 구멍 난 잎에도 악착같이 스며들어 비탈과 단애에 내린 뿌리를 위무하고 칭송하는 축연을 베푼다. 미천한 생도 각혈하는 단풍처럼 살면 우러러보는 날이 온다. 무시근한 심근에 의기가 벋자 저린 발바닥에 힘이 모인다. 바닥을 차고 오르려면 뿌리의 호흡법을 익혀야 한다.
굴타리먹거나 굴왕신같아도 한번 신명지게 살아볼 일이다. 오만 가지 근심을 원願으로 바꾸면 잿불 같은 삶도 단풍 불길처럼 타오른다. 긍정, 긍지로 피운 불꽃은 쉬 꺼지지 않고 사위어도 불씨를 남긴다. 삶이란, 생의 불씨를 지피고 지키고 전하는 질화로 같은 것. 질화로에 묻힌 불씨를 보면 심근의 늧을 알 수 있다. 꽃뫼에 들 때를 안다.
잿불이라고 함부로 다루면 안 된다. 죽은 듯 살아 있는 불씨, 불티, 불김이다. 불김이 샐까 봐 꾹꾹 눌리는 나는 전생에도 불돌이었을까. 불돌에 귓불을 대니 아직도 따뜻하다. 멋대로 그린 삶의 악보를 다시 그려서 심금줄을 퉁긴다. 여전히 쇳소리다. 절창을 하려면 오욕을 내려놓고 인욕을 수행하라는 경쇠소리다. 절규라도 괜찮다. 방황하는 생을 뿌리내리게 할 절창은 절규해본 심근이라야 한다.
속으로 울다가 속으로 단풍 드는 소나무가 단풍 불길 속에 서서 천산만학 단풍을 장엄하게 지휘한다. 정작 길어올려야 할 제 단풍물은 뿌리에 가둔 채, 설물든 단풍에게 격려와 응원을 보낸다. 지휘봉 끝에 눈과 귀가 달린 듯하다. 때와 방법을 몰라 허공을 휘젓던 내 지휘봉 끝에도 심안과 심이를 매단다. 그제야 식솔의 여윈 등과 숨비소리가 들린다.
지휘봉의 강약, 고저, 장단에 따라 삶의 불땀이 달라서, 지휘자나 지도자는 아무나 하면 안 된다. 방황하거나 꿈을 접은 생들에게 뿌리내리는 법, 물길 찾는 법, 차고 오르는 법을 알려줄 혜안이 있어야 한다. 뿌리의 마음으로, 뿌리보다 낮게 엎드려 섬길 줄 알아야 한다.
바람 잘 날 없는 식솔을 지고 태산준령을 넘어온 아버지도 등 굽은 한 그루 소나무셨다. 사철 푸른 뒷산, 불탄 옆산처럼 물들지 못했다. 떡잎 진 식솔을 곱다시 물들이려고 담금질하는 바람에 심근이 찢어질 지경이었다. 어린 눈에 비친 아버지는 고샅길을 막아선 고주박이나 고사목 같았다.
꽁꽁 언 샛강을 단숨에 건넌 아버지는 어서 건너오라고 손짓하셨다. 동상에 걸려 절뚝거려도 아랑곳없으셨다. 내 걸음걸이를 보고 언 샛강처럼 가슴으로 울다가 뼛속까지 단풍 들었을 것이다. 굳은살 하나로 살아오신 아버지의 강을 다 읽기도 전에 세월은 여류하고, 나는 해토머리 샛강가에서 아버지 생처럼 노을빛으로 여위는 중이다.
아버지의 냉엄한 지휘가 없었다면 깊게 팬 굳은살이 준산빙벽을 오르고, 닳은 지문이 삶의 단풍물을 어기차게 길어올렸을까. 겨울을 견딘 뿌리처럼, 언 삶의 샛강을 건너온 생들이 세상을 밝히고 데우고 아우르는 너볏한 뿌리며 단풍이다. 비탈과 단애에도 봄이 오고 단풍 든다. *지돌이를 돌아온 뿌리가 단풍물이 깊고 짙다. 삶의 철칙이며 불문율이다.
불타는 천산만학 행간에 붉은 밑줄을 긋는다. ‘고난 없이 물드는 생은 없다.’ ‘자만, 시기, 증오는 비교에서 싹튼다.’ ‘때를 놓쳤다고 절망하지 마라.’ 등. 종유석 마냥 자란 아집과 편견, 이기와 부정을 뿌리째 뽑아버리는 신통한 경구다. 생각이나 방법, 방향이 나와 다르다고 ‘틀리다’로 곡해하는 나를 일깨우는 지엄한 경구다. 꽃과 단풍, 사람이 아름다운 것은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다름’ 때문이다. 울긋불긋한 천산만학은 누구나 필독, 필사해야 할 위대한 경전. 흙내가 풀풀나도록 읽으면 ‘다름’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고 신뢰하고 받들게 된다. ‘다름’을 꽃 피우는 뿌리 때문에 세상의 준산이 아름답고 향기롭다.
단풍빛에 침잠한 가을은, 설물든 생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려고 맨발로 달려온 두 번째 봄이다. 인생의 봄을 놓친 이들이 절창을 듣고 단풍처럼 활활 타오르기를 염원하는 마음이 절절한 계절이다. 젊은 날 꽃과 열매에게 보내던 박수와 환호를 지금은 뿌리에게 보낸다. 겹겹 상처를 훈장처럼 달고 담담히 제 길을 걷는 뿌리의 노고를 잊었던 탓이다. 무명들에게 존재의 이름을 지어준 뿌리의 고절과 결기로 응달에 뿌리내린 생들과 손을 잡고 걸어간다면, 준산은 툭툭, 흙빛을 털고 천산만학처럼 활활 타오를 것이다.
목관악기로 연주하는 단풍의 절정교향곡을 듣는다. 사람처럼 외로우니까 천산만학에 모여서 옹이가 된 애환을 빛깔로 승화시켜 연주한다. 사람도 저마다의 곡절을 심금줄로 퉁기면 숭고하고 심오한 인생교향곡이 된다. 회한 없는 생이 있으랴. 늘어진 심금줄을 바짝 죈다. 심금줄의 굵기, 장단, 각도에 따라 인생교향곡이 다르다. 삶을 주도하는 뿌리처럼 심금줄 가닥가닥이 인생을 주관한다.
단풍 절정을 보고 곡절 많은 생은 절규, 곡진한 생은 절창이라 말한다. 나는 그날의 마음결에 따라 다르게 들린다. 목근木根처럼 강골해야지 흔들리지 않는다. 절규한 날이 많았던 내 삶을 절창이라 말하는 이를 보면, 삶의 모양과 빛깔은 밖에서 보는 이, 겪는 이가 다른 듯하다. 절창이면 어떻고 절규면 어떠랴. 길 없는 세상에서 길을 내며 살다 보면 죽을 만큼 절규하다가 생이 끝날 무렵 단풍처럼 절창할 수도 있다. 겹겹 상처가 굳은살이 된 뿌리라야 가능하다. 절창과 절규를 다 토해본 생의 마음자리가 천산만학보다 웅숭깊다.
7일을 절창하려고 7년을 땅속에서 절규한 매미의 울음도 단풍빛이다. 단순한 울음인 줄 알았는데 생존을 넘어선, 생태계 균형과 생태학적으로 의미가 큰 울음이다. 단순히 존재하는 생은 없다. 유한하기에 매미나 단풍처럼 치열하고 처절하게 생을 불태운다. 숨탄 것들의 숙명이며 황홀한 비애다. 단풍보다 붉고 매미의 울음보다 처연한 내 생이 절창과 절규 사이를 오가다 생의 노을에 닿은 줄도 모른다.
생애 눈부신 적 없는 나와 갈대를 단풍 불길이 활활 태운다. 생애 가장 찬란하지만 처연한 때다. 절정에 반해서 천산만학을 찾아온 단풍객도 단풍물이 들어 단풍이 된다. 단풍의 절정이 마냥 아름답지 않다. 별리와 소멸을 알리는 마지막 춤사위와 통곡 같아서. 절창을 위해 절규한 단풍 뿌리에서 매미 소리가 요란하다.
천산만학 단풍처럼 고통, 고난을 견딘 이름이 세상에서 제일 눈부시고 명예롭다.
* 지돌이 : 험한 산길에서 바위 따위에 등을 대고 간신히 돌아가게 된 곳.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