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요양원 가는 길
허정진
도심지를 벗어나 늦가을 들녘을 가로지른다. 분주함 속에 풍요가 거쳐 간 논밭에는 허허로움과 적막으로 가득하다. 그루갈이를 하려는지 곱게 가다룬 논이랑이 소멸과 생성의 끝없는 순환 고리를 엮어내고 있다. 갈잎 같은 작은 새떼가 서쪽으로 기울어진 바람을 타고 물결치듯 지나간다. 길섶에 열병처럼 늘어선 풀꽃들이 새삼 알짝지근하다. 세상 밖이어서인지 친숙한 것들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진다.
산중 작은 요양원이다. 2층의 단아한 주택에 넓은 정원을 가졌다. 각종 꽃나무들이 앞뜰을 이루고 뒤뜰에는 여러 유실수들이 실하게 열매를 맺었다. 시득부득 말라가는 꽃잎마다 지난밤 청아하게 빛나던 달빛냄새가 스며들었다. 바닥에 수북한 낙엽들이 흙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이리저리 몸을 굴리며 오체투지 중이다. 별장처럼 단독주택으로 사용하던 것을 개조한 모양이다. 원장인 중년부부와 여덟 할머니가 한 지붕아래 동무되어 살아간다. 식구 많은 어느 가정집 같다.
예배 중이었나 보다. 향기 잃은 꽃밭에 날개 접은 나비마냥 오순도순 정물로 모여 앉았다. 소파나 휠체어에 작은 몸 웅크리고 가는귀먹은 얼굴을 갸웃거린다. 마음과는 달리 찬송가는 늘어지고 우물우물하다. 그래도 잘박잘박 발장단과 휘적거리는 손동작으로 기꺼이 흥겨워하는 눈치다. 형형한 기색도, 펄펄한 기운도 사라졌지만 죽음이후의 삶을 준비하는 과정은 모두에게 절실하다.
우련한 눈빛들이다. 더 이상 변곡점 없는 삶의 여정을 마치 자신만의 속도와 리듬에 따라 움직이듯 담담한 표정이지만 조금은 아쉬운 듯도 한 무엇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복잡하고 혼탁한 생각에서 벗어나 다음 생의 맑은 영혼을 찾아 나선 순례자들 같다. 청안하게 푸르던 잎 다 떨어뜨리고 앙상한 가지들만 남긴 채 침묵 속에 들어간 겨울 숲처럼 야위고 굽은 등은 왠지 서늘하고 쓸쓸하다. 보고만 있어도 자꾸 슬퍼진다.
꽃님이니 달님이니 예쁜 방 이름을 붙여놓았다. 머리맡 탁자에 가족사진첩이 체납된 고지서 같은 그리움으로 쌓여있다. 방안은 정돈되고 청결하지만 온기가 보이지 않는다. 살 냄새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꽃병의 들꽃향기도 머무는 자의 향취일 뿐이지 먼 길 떠나는 사람에게는 결코 미혹과 위무가 되지 않는 모양이다. 갖고 갈 짐도 없다. 옷장과 침대 그리고 발밑에 보따리하나뿐이다.
후덕한 인상의 원장부부가 한마디 귓속말을 전한다. 할머니들 방에서는 밤마다 옷장 여닫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만장처럼 흐느적대는 시간으로 보자기 싸매는 손들이 밤새 사르륵거린다. 입고 갈 고운 옷 하나 머리맡에 두고 크고 작은 보퉁이 발밑에 쟁여놓는다. 꽃님방 구순 먹은 할머니는 엄마가 내일 데리러 온다하고, 달님방 막내 할머니는 고향 뙈기밭에 감자 캐러 간다며 속절없는 밤을 붙잡는다. 산새소리에 늦은 잠이 깬 할머니들은 서둘러 거울속의 온전한 제 모습을 보고서야 주섬주섬 보자기를 풀어 제자리로 돌려놓는다고 한다. 익숙한 일상처럼 호접몽 같은 어젯밤이 파적거리가 되어 저녁이면 지는 꽃잎들 활옷처럼 다시 피는 하루가 이어진다.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시간뿐임을 안다. 되돌릴 수도, 늦출 수도, 멈출 수도 없는 시간이 내게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조락한 내 몸이 안다. 구태여 시간을 욕심내지 않는 저승길에서 생존에 집착해야 할 이유와 의미는 공허하다. 그래서 무덤덤하다. 더 이상 세상에 왈가왈부하지도, 싫은 것을 결코 싫지 않게 넘어가지 못했던 그 완강함도 함부로 드러내지 않는다. 한때의 절망과 결핍들도, 상처투성이 과거들도, 평생 햇빛 한번 제대로 없이 보낸 삶의 남루와 회한도 잘라버린 신경세포처럼 통증을 잃은 지 오래다.
별님방 할머니를 방문한 늙숙한 자식 내외가 있다. 청유형의 완곡어법으로 서로를 위로하는 말들이 날빛 방안을 머쓱하게 떠다닌다. 수다도 눈물도 아닌 그저 허허로운 웃음이나 풀풀 날리며 무료한 오후를 핥아내고 있다. 바쁜 일이 있는지 금방 일어서는 자식의 기름기 없는 목덜미를 보면서 출근처럼 저녁의 기약이 아니라 매번 마지막일 것 같은 아릿한 배웅을 한다. 서로가 맞잡은 미지근한 손의 함의는 무엇을 전하고 있었을까.
요양원이 어떤 곳인지 구경이나 하고 싶다는 어머니와 마지못해 나선 길이었다. 연로하지만 아직은 정정해서 뜻밖의 주문에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인연의 끝은 늘 이렇게 허망한 줄은 알지만 먼 훗날의 일이라고 밀쳐두었던 현실이 편도선 부은 목에 침 삼키듯 묵묵한 아픔으로 다가왔다. 아니라고, 그런 생각은 추호도 하시지 말라고 단호하게 못 박지 못했던 그 순간을 내내 자책하고 불편스럽기만 했다.
음식솜씨만큼 입맛도 까다로우셨는데 이젠 그런 투정마저 번거로워 할 만큼 기력을 잃었다. 단아하던 몸도 나뭇잎 떠나보낸 우듬지처럼 홀로 앙상하다. 그나마 의지하고 타시락거리며 살던 남편마저 떠나보내고 여린 늑골사이 녹슨 거푸집에서는 매일 서늘한 바람이 분다. 노구에서 여자가 사라졌지만 늘 꽃으로 남고 싶었던 어머니는 이제 단풍든 낙엽을 보아도 곱다고 할 줄도 모른다. 당신 자신이 낙엽이니까.
생의 마감을 어떻게 하는 것이 아름다운 모습일까. 자신의 행동과 의지로 생활하다가 천명이 다해 자기 집에서 잠자는 듯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누구나 원하는 행복이 아닐까. 하지만 더 이상 자기 몸 하나 지탱할 기력이 없거나, 내가 나를 몰라보는 만일의 경우가 생긴다면 어찌해야할까. 가족의 사랑과 품안에서 마지막 순간을 보내기를 대다수가 원하지만 실상 현실은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지내는 것이 대다수라고 한다.
전문적인 치료나 호스피스의 심리적 도움을 받는 것이 어쩌면 당사자에게 더 평안한 일인지도 모른다. 먹고사느라 아등바등 대는 현실을 외면하기도 어렵고, 부모자식간의 젖빛 교감만을 내세운 봉양이 언제까지나 효심의 임계점을 견디어낼지도 염려가 된다. 각자의 입장과 처지가 있는 터에 부모를 요양원에 모시는 것을 불효라고 할 수는 없을 테지만 어려운 상황에서도 직접 수발하고 모시는 자식들도 많은 것을 보면 편리나 효율만이 능사는 아닌 것도 같아 마음이 더욱 찹찹해진다.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의 표정 잃은 눈빛이 덜컹거린다. 아무리 시설이 좋고 따뜻한 보살핌이 있다고 해도 가족이 배제된 공간은 시골 간이역처럼 낯선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을 것이다. 행여 자식들에게 짐이 될까봐 요양원을 마음에 두었을지 모르지만 돌아올 수 없는 강 건너듯 그 마음은 먹먹하기 이를 데 없을 듯하다. 부모 다음은 또 우리세대인데 그때쯤 나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불현듯 궁금하다.
서늘한 찬기를 품은 실바람이 차창너머 허공의 발부리에 넘어져 휘청거린다. 노을에 비친 새털구름이 꽃인 듯 눈물인 듯, 어쩌면 하지 못한 말들을 가슴속에 묻어둔 채 떠나는 여인들의 뒷모습 같다. 요양원 가는 길은 무겁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