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벌레'란 호를 가진 정여창 학자를 아시나요?

 

오래전부터 이름 외에 '호'를 쓰는 학자들이 있는데요.

멋들어져도 모자란 판에 자신을 '一蠹 (하나의 종벌레)'라며 한없이 낮춘 조선전기의

성리학자, 鄭汝昌 (1450 ~ 1504)의 겸손함을 짚어보고자 합니다. 

정여창은 조선 전기의 학자로 호는 일두(一蠹)이며,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무오사화로 인하여 유배의 길을 떠나게 되었으며, 갑자사화로 인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 : 무덤을 파헤치고 시신을 꺼내어 처형하는 극형)의

잔혹한 형벌을 당했다. 그는 이 같이 불행한 삶을 살았으나 학문적으로는

정몽주, 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유학의 정통을 전수 받은 성리학의

대가로서 학문의 목적을 성인이 되는 것에 둔 정통파 유학자였다.

 

 

 

일두 정여창 선생 사당비

일두 정여창 선생 사당비(사진출처:문화재청)

 

 

문헌공(文獻公) 정여창(鄭汝昌, 1450 ~ 1504)은 조선 전기의 학자로 호는 일두(一蠹)이며,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본관은 하동으로,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독서에 힘썼고 김굉필과 함께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성종이 성균관에 유서를 내려 경학에 밝고 행실이 바른 사람을 구하자 성균관에서 그를 제일로 천거하였다. 1483년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490년 사정 조효동(趙孝同)과 참의 윤경(尹競)에 의해 효행과 학식으로 추천되어 소격서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지리산에 들어가 진양의 악양동(岳陽洞) 부근 섬진(蟾津)나루에 집을 짓고 대나무와 매화를 심으며 여기에서 평생을 마치고자 하였다. 1490년 참의 윤긍(尹兢)에 의해 효행과 학식으로 추천되어 소격서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자식의 직분을 들어 사양하였다.

성종은 그의 사직상소문의 끝에 “너의 행실을 듣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행실을 감출 수 없는데도 오히려 이와 같으니 이것이 너의 선행이다.”라고 쓰고 사임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예문관 검열을 거쳐 시강원 설서가 되어 동궁(연산군)을 가르쳤다.  이 때 정도(正道)로 보호하고 지도하였으나 동궁이 좋아하지 않았다.

무오사화로 인하여 유배의 길을 떠나게 되었으며, 갑자사화로 인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 : 무덤을 파헤치고 시신을 꺼내어 처형하는 극형)의 잔혹한 형벌을 당했다. 그는 이같이 불행한 삶을 살았으나 학문적으로는 정몽주, 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유학의 정통을 전수 받은 성리학의 대가로서 학문의 목적을 성인이 되는 것에 둔 정통파 유학자였다.

선조 8년에 이르러 문헌공의 시호가 내려졌고, 광해 2년(1610년)에 유교 교육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문묘에 배향되었다. 1498년 무오사화 때 종성(鍾城)에 유배되었다가 1504년 죽었다. 1610년(광해군 2) 문묘에 배향되었다. 나주의 경현서원(景賢書院), 함양의 남계서원(灆溪書院), 합천의 이연서원(伊淵書院), 거창의 도산서원(道山書院), 종성의 종산서원(鍾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문집으로 『일두집(一蠹集)』이 남아있다.

 

함양 일두고택 마당

함양 일두고택 마당(사진출처:문화재청)

함양 일두고택 전경

함양 일두고택 전경(사진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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