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스틴 풍경과 사람과 일상
어스틴은 텍사스주 수도지만 댈러스, 휴스턴, 샌안토니오 같은 도시에 비해 규모가 작다. 반면 행정, 교육의 도시답게 깨끗하고 조용하다. 도시 전체가 참나무 숲속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며, 도심 한가운데를 유유히 흘러가는 콜로라도 강은 그림 같다.
일요일엔 별일이 없으면 참나무 숲속을 지나가는 콜로라도 강변을 한 두 시간 산책한다. 이 어스틴 타워레이크 공원(Lady Bird Lake Trail)은 강변을 따라 조성된 산책로인데, 포장을 안 한 흙길이고 울창한 참나무 그늘이 터널을 만들어 햇빛을 막아준다. 바로 손만 뻗으면 콜로라도 강물을 손에 적실 수 있고 인공 조형물 설치를 거의 하지 않아 자연 그대로다. 도시 한 가운데 올레길 같은 게 있다고 보면 맞을 것 같다. 주말은 물론 평일에도 많은 사람이 강변을 따라 달리기도 하고, 벤치에 앉아 정담을 나누기도 하고, 카약을 타기도 한다.
벤치에 앉아 노을이 지는 강을 바라보는 노부부, 나이는 팔십 대 초중반으로 보일 정도로 연로한데 기품과 우아함이 느껴졌다. 나는 그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무려 세 번이나 그들 앞을 지나쳤다. 너무 보기 좋아서였다. 앉아 있는 모습이 얼마나 다정한지 마치 젊은 청춘남녀 같았다. 할머니를 감싼 할아버지의 팔은 그냥 어깨에 올려놓은 게 아니라 아주 소중하다는 듯 감싸고 있었으며, 할머니는 그냥 할아버지 가슴에 머리를 기댄 게 아니라 할아버지 품에 꼬옥 안기듯 사랑스럽게 기대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보기 좋던지 '성적 에너지'가 느껴질 정도였다. 저 노부부는 아직도 아름답게 섹스도 하겠구나, 할 정도였다. 아니, 어찌나 정겨워 보이는지 누가 봐도 저 노부부처럼 늙어가고 싶다는 소망을 품을 것만 같았다. 노부부도 젊은 연인들 못지않게 어여쁘다는 걸 처음 보았다. 이 어르신들은 동지거나, 친구거나, 애인이거나, 아내이자 남편으로, 행복한 동행을 해 오신 분들일지 모른다. 어쩌면 우리가 꿈꾸는 이상적인 동반자로 말이다.
하와이주 호놀룰루도 평화롭고 아름답지만, 어스틴의 평화로움과 아름다움은 하와이의 그것과는 맛이 다르다. 호놀룰루의 아름다움이 화려한 서양화라면 어스틴의 아름다움은 여백 많은 동양화 같다고나 할까.
주택이며 도로들이 숲속에 있다 할 정도니 많은 새, 청설모들은 물론 야생 사슴들이 자주 출몰한다. 사슴은 사람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고 사람들은 사슴들에게 조금의 어떤 스트레스도 주지 않는다. 길가 풀을 뜯고 사람은 조깅을 하고..... 흔히들 사람들은 하와이를 지상낙원이라 하지만, 난 처음 이 광경을 보며 혹시 여기가 진짜 지상낙원이 아닐까 했다. 인간이 사슴과 함께 사는 도시가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 아닐까.
그러나 여러 사람이 모여 있는 일터(직장)는 평화롭고 조용하고 아름답지만 않다. 그래도 이만한 갈등. 시끄러움. 치사함이 없는 곳이 어디 있겠는가?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날이면 퇴근 후 집으로 가지 않고 콜로라도 강변으로 나가 이런저런 상념에 젖다 온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은 호수같이 푸르고 잔잔하다. 한강보다 아름다운 풍경이지만 한강만큼 좋을 리는 없다. 강가에 노을이 물들면 고향 바다의 낙조를 생각하고, ‘내가 만일 하늘이라면 그대 얼굴에 물들고 싶어. 붉게 물든 저녁 저 노을처럼 나 그대 뺨에 물들고 싶어~’, 안치환의 “내가 만일”을 읊조린다.
또, ‘달빛 부서지는 강둑에 홀로 앉아 있네. 소리 없이 흐르는 저 강물을 바라보며..., 산등성 위에 해질녘은 너무나 아름다웠었지~’, 박미경의 “민들레 홀씨되어”를 마음속으로 부른다.
뜬금없이 아돌프 히틀러도 떠올리다 집으로 돌아오곤 한다. 히틀러는 연설할 때마다 해질녘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거인처럼 긴 그림자를 남기며 등장하여 대중선동을 했다고 한다. 석양은 사람을 감성적으로 만들고 심리적 저항감을 약화시킨다고 한다. 따라서 쉽게 흥분하고 몰입하기에 대중선동에는 그만이고, 연인들은 사랑 고백이나 프러포즈도 노을 속에서 하면 더없이 효과적이란다.
오늘도 콜로라도 강가의 저녁노을은 아름답다. ‘아름다움’이란 단어가 기쁨보다 슬픔에 가까운 말 같다는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온다.
회사 매장은 언제나 나지막이 음악 전문 라디오 방송을 튼다. 거기에선 대개 올드 팝이 흘러나온다. 따라서 내가 아는 팝송도 많이 나왔다. 아는 팝송이 흘러나오면 때론 혼자 흥얼거리며 일하기도 한다. 하루는 어델(Adele)의 썸원 라이크 유(Someone Like You)를 나직이 흥얼흥얼하며 일하는데 갑자기 잔이 다가와 “너, 이 노래를 아느냐”고 물었다. 어델을 좋아한다고 대답하니 자기도 매우 좋아한다며 악수를 청했다.
이십대 후반이라는 잔과 밥은 미남인데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게 모델을 해도 손색이 없을 청년들이다. 자신이 이태리계라고 매우 자랑스러워하는 밥은 유머러스하며 늘 밝고 명랑하다. 이따금 양손을 벌리고 어깨를 들썩이며 과장 섞인 제스처를 취하는 전형적인 미국인이다. 반면에 잔은 이런 미국 사람도 있나 싶을 정도로 말이 없고 무표정하고 꾹 다문 입술은 당혹스럽도록 낯설다. 그의 눈은 언제나 우수에 차있으나 말을 걸면 의외로 부드럽고 다정하여 반전의 매력이 있다. 밥이 편안하다면 잔은 조금 어렵다. 하지만 잔과 서로 음악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부터는 손짓발짓으로 대화를 하며 친숙하게 되었다.
오늘도 매장에 ‘Open arms’가 흘러 나왔다. 잔이 다가와 눈빛으로 이 노래를 아느냐고 물었다. 안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도리어 잔에게 “네가 이 노래를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다. 이 노래는 오래돼서 네 어머니가 젊었을 때 유행하던 거라고 하니 잔은 안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도 저니(Journey)를 매우 좋아한다고 했다. 말이 잘 안 통해도 어떠한 공감대가 형성되면 급속히 친해진다.
올해 전문대학을 졸업했다는 바바라는 170 정도의 키에 금발로, 얼굴은 작고 예쁘지만 몸피는 매우 마른 편이라서 바비 인형 같기도 하고 순정만화에 나오는 주인공 같기도 하다. 화장은 한 듯 안한 듯 하며 노출이 거의 없는 옷을 입는다. 말수가 적으면서 수줍음이 많아 웃어도 이를 드러내는 법이 없고 입 꼬리만 약간 올라가는, 잔만큼 우수에 찬 눈동자는 아니지만 항상 조용한 눈빛과 잔잔한 미소를 띠는 그녀는 어딘가 모르게 동양적이었다.
화장이 진한 편인 S는 한국 여자며 삼십대 후반으로 보이고 바바라 정도의 키에, 터질듯 풍만한 육체를 소유했다. 농염하기 이를 데 없으며 표정은 늘 자부심인지 자신감이 가득하고 에너지가 넘쳐흐른다. 미국 여자들보다 더 미국 여자 같은 포스(force)다. 목소리는 비음이 약간 섞여 끈적끈적 거린다.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옷차림은 개인의 미의식 표출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매력은 오직 섹스어필이라는 듯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쫄티와 바지를 즐겨 입는 S의 패션은 매우 도발적이라서 나는 되도록이면 그녀와 마주치지 않으려 한다.(민망하니까.) 그녀의 패션은 회사가 제재할 수 없을 만큼의 선을 아슬아슬 지키며, 화려하고 도전적이다. 도전적이란 말은 그녀의 옷차림이 키치패션(Kitsch-Fashion)에 가깝다는 것이다.
패션스타일로만 본다면 S는 분명 개방적이거나 자유주의자거나 진보적인 사람일 것 같다. 반면 바바라는 눈에 도드라지는 색감보다는 무난한 컬러로 단정하게 꾸며 입는 게 보수적인 아가씨일 것 같다.
여기서 문제는 같은 민족인 S에게는 이질감을, 말도 안 통하는 미국 여자 바바라에게는 정서적 동질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내가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사람이라면 S의 옷차림과 화장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단정하고 조용하다는 이유만으로 바바라에게 정서적 동질감을 느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 자신에게 내재되어 있는 보수성이 무엇인지 모르니 한심스러운 것이다.
퇴근 후 이따금 말이 잘 안 통하는 밥과 소주를 마실 수 있으니 아이러니다. 내가 그림과 영화를 좋아하는데, 이십 년이나 어린 밥도 그림과 영화를 좋아한다. 말로 섬세한 표현을 주고받을 수 없지만 감정적 동질감은 언어의 장벽도 뛰어넘는다. 말이 그렇게 잘 통하는 한국 동료들과는 술 한 잔 기울일 수 없으니 알다 가도 모를 일이다.
친구는 무엇으로 될 수 있을까. 소통과 교감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새삼스럽지만 간절한 질문이다.
일과를 마치고 저녁을 먹고 나면 대개는 바둑을 두거나, 음악을 듣거나, 때때로 무언가를 읽고, 무언가를 쓴다. 그러다 새벽 한 시경 잠자리에 든다.
오늘도 타향의 밤은 깊어 가고 이것저것 읽다가 끼적거리는데, 갑자기 고교생 아들 녀석이 피아노를 친다. 감사한 것은 이 녀석 피아노 연주 솜씨가 제법 근사하다는 것이다.
난데없이 조용한 집안에 피아노 선율이 함박눈처럼 쏟아진다.
아, 아름답다. 생음악이 주는 살아있는 감동.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온다. 그리고 슬픔이 밀려온다. 이루마의 “Kiss The Rain”.
아름다운데 왜 슬프지...
갑자기 피아노 소리가 끊긴다. 아내가 아들에게 밤이 깊어 이웃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으니 그만 치란다. 그냥 조금만 더 놓아두었으면 좋으련만......
가을 고향의 밤, 멀리서 들려오던 퉁소소리. 한겨울밤 도시 골목길을 총총히 걸어가는데 어디선가 들려오던 피아노 소리. 어릴 적이나, 청춘이었거나, 오십이 넘은 장년이거나, 나는 이런 것들에 유정하다.
아름다우면 기쁜 것 아닐까. 그런데 왜 슬프지.
기쁜 것이 아름다울 순 없을까. 마음이 즐겁고 행복한 것은 ‘아름다움’과는 차원이 다른 감정의 물결 같다. 따라서 기쁜 것이 아름다울 순 없을 것 같다.
아름다운 것은 슬픈 것일까. 슬픈 것은 아름다운 것인가. 슬픔이 먼저인데 그 속에 아름다움이 배어있는 건가.
슬픔이 카타르시스를 주고 그 감동이 아름다움으로 전이되는 것이라면 슬픔은 아름다운 것이라는 역설도 성립될 수 있을 것 같다.
어쨌든 나는 이 밤도 집시(gypsy)가 되어 스페인에서 플라멩고를 추다 헝가리, 체코까지 이곳저곳을 유랑한다.
글 뒷부분에 선생님의 하루를 보내는 율동이 느껴지네요.
아드님의 피아노 운율이 어땠을까 상상도 해봅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