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메큘라에서 듣는 “아름다운 강산”
테메큘라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리버사이드군 남서쪽에 위치한 관광지이자 휴양 도시이다. 지리적으로 다운타운 로스앤젤레스보다 다운타운 샌디에이고에 더 가깝게 위치해 있으나 로스앤젤레스 대도시권의 일부이다. 현재는 캘리포니아의 나파밸리, 소노마밸리 등과 더불어 대표적인 와인생산지로 유명해졌다.
관광 명소로는 테메큘라 올드타운(Old Town Temecula), 페창가 리조트 앤 카지노(Pechanga Resort and Casino), 랜초 캘리포니아 스포츠 파크(Rancho California Sports Park) 등이 있으며, 매년 스키너 호수(Lake Skinner)에서 개최되는 테메큘라 열기구와 와인 축제(Temecula Valley Balloon & Wine Festival)가 유명하다.
주말, 테메큘라 페창가 리조트 앤 카지노에서 열린 이선희 공연을 관람했다. 많은 교포분이 참석해 공연장은 뜨거웠다. 이선희의 압도적인 가창력은 단연 콘서트에 최적화된 가수 같았다. 역시 그곳에서도 “아름다운 강산”을 부를 땐 모든 관객이 일어나 열광했다. 얼마나 광열 하던지 부처님도 일어나셔서 팔다리를 흔들 것 같다는 방정맞은 상상도 했다.
개인적으로도 기분이 울적할 때면,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이선희가 부르는 “아름다운 강산”을 크게 틀어 놓곤 한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신이 난다. 힘찬 사운드와 이선희의 박력 있는 목소리는 침체된 몸과 마음에 금세 활기를 불어넣어 준다.
“아름다운 강산”은 세간에서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제2의 애국가로 불리며 애창되는 국민가요다. 원래는 신중현이 작사 작곡한 것으로 대한민국의 이상향을 노래하고 있다.
한국 사람이라면 너나 할 것 없이 좋아하는 이 노래를, 병적으로 싫어하는 의외의 사람도 있다. 아니, 이 노래를 들으면 귀를 막고 고통스럽게 진저리치는 사람도 있다. 막 50대에 접어든 아우는 운동선수여서 체육고등학교와 체육대학을 졸업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기숙사 생활만 7년하고 사회생활을 했으니, 본의 아니게 일찍이 집을 떠나 독립했다.
아우는 이선희만 들어도 십 리는 도망칠 지경이다. 아우의 학창 시절은 합숙 훈련 그 자체였다, 이른 새벽 기상 시간만 되면 이선희의 “아름다운 강산”을 스피커 볼륨 최대치로 틀어 놓기에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었다고 한다. 젊은 청춘들에게 꿀맛 같은 새벽잠을 인정사정없이 빼앗는 노래가 어찌 음악으로 들리었으랴. 악마 소리 같았다는 것이다. 집 같으면 어머니가 깨우면 이불자락을 붙잡고 “조금만, 조금만” 하며 어리광도 부렸을 여린 청춘들에게 그들의 단잠을 가차 없이 짓밟는 소리는 정말 악마였을 것이다.
특히나 지금까지도 공연장에서 관중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이선희의 “아름다운 강산”을, 어쩌다 TV에서 보면 아우는 듣자마자 소스라치고 고통스러워한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빨리 끄라고 고함을 지른다. 일종의 트라우마리라.
아우처럼 대부분이 공감하는 상황을 개중엔 정말 그러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 사람이 이상해서가 아니라 살아온 환경과 경험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느낌’이 다르기에 반응도 달리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느낌이란 생각과 연동된다. 즉 느낌이 다르면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너는 왜 우리와 느낌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냐고 억압할 게 아니다. 인간을 천편일률적으로 재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군부 독재 시절을 겪어온 우리 세대는 같은 생각과 같은 행동 양식으로 생활하길 직접적으로 강요받았던 세대다. 지금은 경제 권력이 간접적으로 우리의 생각과 행동 양식을 문화적으로 지배하고 있지만 말이다. 내 조국은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남자가 머리가 길다는 이유로, 여자가 치마가 짧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았다. 장발이, 미니스커트가, 죄가 되는 사회였다. 즉 개성과 다양성을 몰살하고 획일화를 획책하는 시대가 있었다. 다른 것을 틀렸다고 하던 때였다.
사람은 저마다 취향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취미도 다르고, 능력도 차이가 난다. 다름을 인정하면 사람과 사람을 비교하지 않는다. 교육적으론 인간의 가치를 성적순으로 줄 세울 수 없다는 뜻이다. 다름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수긍한다면 경쟁이 아니라 공생을 가르치고 배울 수 있다.
유전자는 개체로서 특수성과 종으로서 보편성을 담고 있다. 인간은 나와 우리가 함께 있는 존재다. 곧, 개별자인 동시에 보편자이다. 따라서 보편성과 개별성을 동시에 바라보아야 한다.
인간의 개별성을 증명하는 이론적인 배경을 제공한 사람은 100여 년 전, 정신분석학자 칼 융이다. 개별성의 분명한 자각은 전체주의의 폭력성을 배격하고 민주주의를 성숙시키는 밑거름이 됐다. 또, 철학자 들뢰즈는 인간의 “차이”를 인정함은 물론 서로의 발전적 변화를 깊이 모색했다. 차이를 부정하고 일반화하는 것은 파시즘에 빠질 위험성이 다분하다.
인간이 각자 다르고 차이가 난다는 엄연한 사실이 존중되지 않은 것은 권력의 지배욕 때문이다. 정치권력이든, 경제 권력이든, 문화 권력이든, 권력은 인간 개개인을 동일시하고 일반화시키고 싶어 한다. 그래야 지배하기가 싶기 때문이다. 이들은 개인보다는 집단을 중시하고 강조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관계”가 매우 중요하고 이 관계는 “보편성”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개별성”이 무시된 “관계”란 건강한 사회라 할 수 없다. “보편성”이 지나치게 강조되는 사회는 집단주의에 빠지게 될 위험성이 크며 정치적으론 독재의 등장을 가져올 것이다. 이데올로기든 종교든 어떤 이유로든 인간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는 병든 사회다. 안타깝게 세상에는 아직도 이런 나라들이 많다. “개별성과 보편성”,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이루는 게 좋은 사회일 것이다.
그동안 수없이 듣고 흥얼거렸던 이선희의 “아름다운 강산”인데, 더군다나 미국 테메큘라에서 많은 교포와 떼창을 하는데, 갑자기 진정 아름다운 강산이 되려면 남도 아닌 북도 아닌 한반도 전체가 자유롭고 평화로운 세상이어야 하는 것 아닌가 반문한다.
인간의 다양성, 개별성과 보편성을 균형있게 담는 '아름다운 강산'은 언젠가 어딘가에 있겠죠?
도시와 향연, 음악, 철학, 그리고 사회에 대한 사고의 범위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