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밸리(Death Valley) 공간과 시간

 

 

 데스밸리는 애머고사산맥과 패너민트산맥 사이를 가로지르는 모하비 사막의 한 모퉁이에 자리 잡고 있다. 전체 길이가 약 225km, 넓이가 대략 26km에 이르는, 미국에서 세 번째로 넓은 국립공원이다. 면적이 11,200m²로 제주도 7배나 된다.

 데스밸리는 북미대륙에서 제일 더운 곳이다. 1913713일 데스밸리 기온은 56.67를 기록했는데, 이는 1922년 사하라 사막에서 57.78기록이 관측되기 전까지 지구 역사상 최고 높은 온도였다.

 데스밸리는 사람이 견디기 힘든 극한의 기후 속에 암석과 황무지와 모래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 척박한 땅에도 미미하지만, 동식물들이 살며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준다.

 데스밸리는 바다가 융기해서 물이 모두 증발하여, 거대한 소금 벌판이 만들어졌다. “배드워터(Bad Water)” 소금 바닥은 해수면보다 약 85미터가 낮아 지구에서 제일 낮은 곳이다.

 19세기 미국 서부 개척 시대, 사람들은 금맥을 찾아 캘리포니아로 찾아들었다. 그 신천지로 가는 지름길이었던 이 사막 길에서 많은 이들이 극심한 더위와 갈증으로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이곳을 천신만고 끝에 통과해 간신히 살아남은 자들이, 이 척박하고 무더운 황무지 이름을 데스밸리(Death Valley)라 명명하고 목숨을 잃은 선조 개척자들의 영혼을 위로했다.

 데스밸리는 휴대전화도 터지지 않고 여름 한낮 기온이 50에 육박하기 때문에 물은 충분히 준비해야 하며 타이어 펑크도 대비해야 한다. 이상은 데스밸리에 관한 개괄적 설명이다.

 

 아내에게 데스밸리를 가자고 한 건 순전 죽음의 계곡이란 지명이 주는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데스밸리에 관한 어떤 정보도 공부하지 않고 찾아갔다. 문명이 스민 땅이라면 당연히 문화가 있을 것이기에, 여행지에 대해 공부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태고적 자연만 있을 공간은 어떤 곳일까 궁금했다.

 집에서 새벽 5시 출발 5번 도로 타고 가다 N 14번 타고 9시경 도착했다. 그리고 데스밸리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다, 오후 4시경 라스베이거스를 경유해서 귀가 집에 도착하니 9시가 넘었다. 하루 종일 사막을 운전하며 다녔다. 생전에 사막이란 곳을 직접 밟아보고 만져 본 건 처음이다.

 

 자브리스키 포인트에 서서 각양각색의 협곡 즉, 기괴한 암석 모양과 색상 등을 바라보자면, SF영화에 나오는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일어날 정도다. 결코 누구의 발길이나 손길도 닿지 않았고, 닿을 수 없는 절대적 공간이 떠올린다. 절대적 시간과 절대적 공간이 존재한다는 뉴턴의 말이 맞는 것만 같았다.(물론 이것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의해 부정됨) 이 우주는 상대적인 것은 있어도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감정적으로 자꾸만 절대성이 부각 되어옴은 어쩔 수 없었다.

 누가 데스밸리에 갔다 온 소감을 묻는다면 다시는 가지 않는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사막이 주는 황폐함과 메마른 느낌을 정서적으로 견뎌내기가 너무 힘들었다. 거대한 소금밭, 곡선이 예쁘기까지 한 모래 언덕, 등등 다 좋았으나, 신기하다는 것 외에는 어떤 감흥도 없었다. 사막이 주는 무생물의 아름다움이 아무리 화려할지라도, 보잘것없는 생명체가 주는 감동에 비해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오직 색다르다는 것 외에 감동이 없으니 위안이 안 되었다. 힐링이 안 되는 자연의 신괴함은 기상천외할지라도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모든 것이 새로웠지만 궁금증을 자아내지 못했고 급기야 갑자기 지루해졌다. 견디기 힘든 삭막함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기름기 하나 없어 생명 한 톨 품을 수 없는 황척한 산과 황무지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죽음만 있기에 시간성이 무의미한 공간이었다.

 데스밸리, “죽음의 계곡속에서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생각났다. 생명이 없는 공간은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생성과 소멸, 삶과 죽음 즉, 소멸. 죽음이 없으면 영원만 있기에 시간은 존재할 수 없다. 반대로 생성과 삶만 있어도 영원하여 시간이란 의미는 필요 없다. 사막을 헤매는 동안 자연의 신비로움에 감탄하기보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내내 곱씹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죽음을 안고 살아감을 늘 인식해야 한다.”.

 “인간은 죽음을 인식하고 살아가는 본래적 존재와그렇지 않은 비본래적 존재로 구분한다.”. ‘비본래적 존재, “죽음에 대한 인식이 없으므로 자기 삶에 대한 실존적 고민이 없는, 삶의 방향성을 잃은 존재. 그들에게 시간은 의미 없이 흘러가는 세계 속에 다가오는 것일 뿐이다. ‘타인이 만들어 놓은 세상 속에서 뒤처지지 않을까 늘 염려하며 자신의 존재를 잊고 산다.

 그러나 본래적 존재죽음을 직시하고 매 순간 인식하며 정확한 목표와 방향성을 가지고 이 땅을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삶은 멈춰 서는 법이 없으며 타인이 만든 세계에 매이지 않고 늘 자신을 돌아보며 죽음 앞에 당당한 삶을 살아간다. “참된 인간의 삶은 죽음을 직시하고 자기 안의 (양심)을 따라가는 것, 끊임없이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생사여일(生死如一), 삶과 죽음은 하나와 같다.

 

 데스밸리, “죽음의 계곡을 지나며 생명을 품지 못하는 대지의 슬픔, 안타까움만 보고 온 것이다. 그리고 천 길 계곡과 사막이 주던 공포와 두려움에 내 존재를 진지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하이테거(1889~1976) 독일 철학자.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교수ㆍ총장을 지냈으나, 나치에 협력하였다.(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위대한 시인이나 적극적으로 친일을 한, 서정주와 비슷하다 할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