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에서 그리는 고향의 봄

 

 

 

 

 나무와 화초 가꾸기에 진심인 아내 덕에 눈 호강을 하며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올해도 레몬 나무와 파파야 나무 중간에 있는 복숭아나무에 꽃망울이 팥알처럼 움트는 것부터, 꽃이 다 지고 잎새가 돋아나는 과정을 출퇴근 아침저녁 오가며 즐겼다. 복숭아꽃을 유난 좋아하는 것은 고향 마을 과수원에 꽃이 피던 전경이 마치 빈센트 반 고흐의 "분홍빛 과수원" 같았기 때문이다.

 고국을 떠나 이국에서 사는 사람으로 고향이란 늘 사무치는 곳이다. 고향은 내 몸과 영혼을 낳고 키워준 우주다. 충청도 서해안에서 태어나 초·중학교를 마치고 읍내에 있는 고등학교에 갔다. 그리고 대학 때 처음으로 대처로 나갔다.

 

 비알밭에 보리가 짙푸르고 햇빛은 눈 부셔 실눈을 뜨고야 겨우 앞을 볼 수 있던 봄날의 시골 마을은, 평화롭기보다는 하도 적막해서 물속 같았다. 병치레가 많아 학교에 자주 못 갔던 초등학교 시절, 또래 아이들은 모두 학교 가고 어른들도 다 들에 나가면 그러잖아도 한적한 시골 마을은, 정말 끔찍할 정도로 조용했다. 투명한 햇살만 대 빗자국 선명한 울안 마당 가득 쏟아져도, 세상이 멈춘 듯한 정적은 좀처럼 깨질 것 같지 않았다. 난 아무 생각 없이 마루에 혼자 앉아, 적막의 아득함과 막막함을 혼자 대면해야 했다.

 고향 뒷산은 제법 높은 편이었고, 마을 앞으로는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고 그 끝은 바다가 보였다. 동네 애들과 뒷동산에 올라 놀다 보면 어느새 저녁때가 되고 하늘보다 먼저 붉게 물든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붉은 물감을 엎은 듯한 바닷속으로 둥글고 커다란 해가 서서히 사라질 때, 난 어떤 끝없는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듯한 현기증으로 움직일 수 없었다. 그 알 수 없는 저녁노을의 붉디붉은 기운은, 아이들이 다 돌아간 후에도 날 그 자리에 앉혀 놓았다. 결국은 엄마가 오셔서 날 업고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특히 엄마 등에 업혀 갈 때, 엄마의 가쁜 호흡이 소리가 아닌, 당신 가슴이 반복적으로 오므렸다 피기를 거듭하면서 내 온몸에 전달되는 숨결이 철없이 좋기만 했다.

 고향이 바닷가라서 늘 일몰을 보고 자랐다. 하늘과 바닷물을 벌겋게 물들이며 서서히 바닷속으로 사라지는 태양은, 어린 마음에도 뭔가 모를 안타까움을 주었다. 바닷속으로 점점이 빠져드는 해는 아이가 아무리 발을 동동 굴러도 막을 수가 없었다.

 바닷가의 저물녘은 여느 지역의 해 질 녘과 확연히 다르다. 하늘을 물들인 저녁노을만 볼 수 있는 도시라면 그리움 같은 서정을 안겨주겠지만, 바닷가의 저녁노을은 하늘과 바다가 동시에 새빨간 핏빛으로 선연하게 물들어 뭔가 모를 절절한 안타까움, 애절함, 간절함 같은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아마도 내 모든 슬픔의 심상은 이 낙일에서부터 시작된 것 같다. , 낙조의 풍경은 만남의 기쁨보다 헤어짐의 슬픔이 더 크다는 것을 무의식 속에 심어주었던 것 같다

 

 고향의 뒷산은 진달래꽃이 유난히 많았다. 봄이면 악동들과 섞여 진달래꽃을 따 먹으러 산을 오르곤 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진달래를 꺾으러 산에 가려면, 용천배기(문둥이)가 병을 낫게 하려고 어린아이만을 잡아 간을 내어 먹는다고 했다. 아마 아이들끼리만 산에 가는 게 위험하니까, 못 가게 할 요량으로 했던 말 같다. 우리는 무서웠지만 그래도 진달래 만발한 산으로 갔다.

 그 아름다운 참꽃을 그냥 먹는 걸로만 알았던 순진무구하던 시절, 초등학교 오 학년 때 우연히 누나 책꽂이에서 소월의 진달래를 읽고, 그 꽃이 먹는 꽃이 아니란 걸 알았다.

 어머니는 해마다 진달래가 만발하면 누나들과 함께 진달래를 따다 술을 담곤 했다. 연붉은빛이 말갛게 감도는 진달래술은 꽃만큼 아름다운 색을 띠었다. 그 빛깔은 사람을 유혹하기에 충분했다. 이 술은 진달래꽃 색이 소쩍새 입속 색깔과 닮았다 해서 두견주(杜鵑酒)라고도 한다.

 산 중턱에는 부락 신을 모시는 당집이 진달래꽃 구름 위에 떠 있었다. 돌로 쌓아 만들어진 오두막이지만 그 위용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신령스러움이 깃든 집이었다. 당집은 깊은 가을밤, 일 년에 한 번 어른들과 왔다 가는 곳이었다. 진달래꽃을 따 먹다 말고 호기심이 발동한 아이들은 귀신 나온다고 벌벌 떨며, 닫힌 문틈으로 당집 안을 들여다보았다. 어두컴컴했지만 도깨비는 살지 않았고, 형체를 알 수 없는 물건들 속에 희미하게 커다란 나무 상자 같은 게 보였다. 진짜인지는 모르지만, 언젠가 아버지께서는 그 나무 상자 안에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 친필이 모셔져 있다고 했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겨울이 오기 전 동네 사람들은 마을을 지켜 주는 동신(洞神)에게 한해의 무병과 풍년을 감사해하는 당제를 지냈다.  돼지, 닭 등 가축을 잡고 술과 떡, 과일, 음식을 푸짐하게 장만하여 보름달이 환한 당집 앞에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마을 사람 모두는 밤늦도록 잔치판을 벌였다. 이 합법적인 일탈의 시간에 동네 청춘남녀들은 그들만의 섬씽(something)도 생겨나지 않았을까? 돌이켜보면 시골 마을을 지배하던 완고한 유교적 분위기 속에서 이것은 어쩌면 디오니소스 축제라 할 만했고, 미약하나마 신화적 요소가 남아있던 때 같다. 산업화가 본격화되기 이전인 1960년대 내 고향 풍경이다.

 

 내 불알동무네를 동백나무 안집이라 했는데, 인근 마을에선 제일 큰 집이고 주변을 울창한 대나무 숲이 감싸고 있었다. 보통은 대나무 숲에 안겨있는 집 같았는데, 바람이 불면 대나무 숲이 꼬옥 껴안고 있는 집 같았다. 돋보이는 건 대나무보다, 집보다뒤꼍에 높이 솟은 아름드리 동백나무였다. 우리는 거기서 떨어진 동백꽃을 주워 빨아 먹으며 놀곤 했다. 어른이 되면서 달큰한 맛을 수없이 맛보았지만, 지금도 달짝지근한 맛은 동백꽃만 한 걸 경험해 보지 못했다.

 동무네 집 뒤꼍은 악동들의 놀이터였다. 장독대는 여느 집보다 서너 배 정도 커 보이는 규모고 바닥은 조약돌이 깔려있었다. 장독대엔 꼬맹이들 키보다 큰 된장, 고추장, 간장 항아리가 즐비했다. 특이한 것은 동백나무 옆에 크고 깊은 동굴이 있었다.

 우린 그 장독대에서, 동굴 속에서, 대나무 숲에서, 숨기 장난을 하며 놀기도 했다.

 봉숭아, 맨드라미, 채송화가 피고 지던 장독대, 대나무 숲에 일던 찬 바람 소리, 두려움과 호기심을 함께 주던 컴컴한 동굴 속, 혼자이면서도 대나무숲을 압도하던 동백나무. 그 뒤꼍은 밖에선 볼 수 없는 우리만의 독무대였다. 당나귀 임금님이 나오고, 마귀할멈이 나오고, 일곱 난쟁이도 나오고, 혹부리 영감도 나와, 한나절을 뛰어놀다 가곤 했다.

 동백꽃이 얼마나 붉은지 새하얀 눈 위에 떨어져 있는 걸 보면 생피를 뚝뚝 흘린 것 같았다. 시들어 힘없이 떨어지는 보통의 꽃들과 달리 동백은 절정의 순간에 그대로 툭, 떨어지기에 그 살아있는 아름다움과 처연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물론 개구쟁이들에겐 그게 맛있는 간식거리였지만. 그땐 산다는 게 뭔지, 슬픔이 뭔지도 까마득히 모르던 시절이었다.

 

 고등학교 땐 읍내로 버스 통학을 했는데, 학교 옆 도립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열 시 막차를 타고 집에 오곤 했다. '방골앞'이라는 버스 정거장에서 내려 집까지 이십 분 정도 걸어오는 길이였다. 시골 밤길은 언제나 기분을 상쾌하게 했다. 봄날 마을 어귀에 들어서면 아카시아 향기가 옅은 밤안개와 함께 동네를 감싸곤 했다. 내가 들국화 향기 다음으로 좋아하는 아카시아 향기는, 나를 쩔쩔매게 햐는 매혹적인 향이었다.  

 우리 동네는 봄에 안개가 많이 끼었다. 안개도 그냥 안개가 아니고 지척을 전혀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의 농무였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난 그 안개 속 들판을 일부러 쏘다녔다. 안개와 눈이 많았던 내 고향, 난 산과 바다가 있는 그곳에서 태어나고 그곳에서 자랐다. 내 육체와 정신은 온전히 고향 것이다.

 

 언제나 정겹고 포근한 건 이 세상 고향 말곤 없다. 있어도 그립고 떠나도 그리운 땅. 나를 낳고 키워준 산천초목도 그리움의 대상이지만 그 중심엔 사람이 있다. 고향 사람들, 고향 친구들... 사람이 없는 고향은 생각할 수 없다. 땅이 의미 있는 건 그곳에서 사람이 살았기 때문이리라. 거창하게 말하면 역사와 문화가 있는 공간이고 개인적으론 추억이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산업화가 심화돼 너 나 할 것 없이 고향이 사라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립고 안타깝고 허전한 마음은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특히나 조국을 떠나 이국에 사는 사람들에겐 더욱 그러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