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대하여(1)

 

 

 텍사스 어스틴의 일상은 평화로운 건지 지루한 건지 분간을 못하겠다. 아무튼 직장에서 하루 종일 나지막이 틀어주는 음악 전문 라디오 방송에선 수많은 팝송이 흘러나오지만 유독, 내 귀에 꽂히는 건 어델(Adele)의 썸원 라이크 유(Someone Like You). 애절하기 이를 데 없는 이 노래가 많게는 서너 번씩 흘러나온다. 벌써 3개월이 다 돼간다.

 

 흑인 창법에 절묘하게 쏘울(soul)이 묻어나는 호소력 짙은 어델의 목소리는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하다. 한국적으로 보자면 어델의 탁성(濁聲)은 우리의 소리와도 잘 맞을 것 같다. 판소리 발성의 수리성(쉰 목소리와 같이 껄껄하게 나오는 소리) 같은 그녀의 목소리는 창()을 배워도 잘 어울릴 것 같다. 탁성을 많이 사용하는 우리 소리 민요, 판소리에 익숙했기 때문인지 내겐 본능적으로 어델의 소리가 친근하게 다가온 건 아닐까 싶다.

 "Someone Like You"는 사랑했던 연인이 자신을 떠나 다른 사람과 결혼했어도 사뭇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노래다. 떠난 사람일지라도 그에겐 여전히 사무치는 사람이다. 감정이란 게 단번에 정리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인간이라면 누구나 변치 않는 영원한 사랑을 꿈꾼다. 그러나 현실에선 일어나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사랑이 변하여 떠났을 때 그 상처는 무엇으로도 대신하기 힘들다.

 사랑의 상처는 어떤 경우든 아프다. 상대에게 내 자신이 거부되었을 때의 충격과 괴로움은 손쉽게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인간사에 사랑만큼 온전하게 감정이입이 되는 것은 없다. 애초부터 변한다는 것은 상상도 해보지 않는다. 그러기에 사랑이 깨졌을 땐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고통을 받는다. 이런 일은 사랑 말곤 없다.

 사랑하는 연인들 사이에 변치 않는다는 전제가 없다면 연애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변치 않는다는 암묵적 조건이 있으므로 정서적 교감이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전제가 결과를 담보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모든 연인은 자신들의 사랑에 절대성과 영원성을 부여한다.

 사랑이란 순정하고 숭미한 마음도 매우 가변적인 감정일 뿐이다. 바람 같거나 구름 같은 것이다. 사랑도 감정인데 이것이 영원할 거라 믿는가. 하루에도 수천 번 변하는 게 사람 마음인데 어찌 사랑만은 변하지 않을 거라 믿는가. 이것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착각이거나 무지의 소산이다. 아니 사랑의 마력이 분별력을 잃게 하기 때문이다. 인간사에 절대적인 게 없는데 왜 사랑에 절대적 의미를 부여하는가. 우리가 그냥 믿고 싶은 거지 실상은 그런 게 아니지 않는가.

 사랑, 우정, 의리, 등 가치가 고귀하다 하여 영원하진 않다. 변하지 않아야 한다는 당위가 필연이 되진 않는다는 것이다. 영원하길 열망할 뿐 반드시 무궁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사랑에 대한 굳은 약속, 맹세는 구속력보다는 우리의 절실한 바람과 희망일 뿐이다.

 

 누구에게는 세상 전부일 수 있는 일이 누구에게는 별것 아닐 수도 있는 것이 인생이다. 내겐 목숨같이 중요한 일이 다른 사람에겐 하찮은 것이 삶이다. 사랑도 사람 일이라 이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 사랑을 비롯한 인생사 모든 의미는 철저하게 주관적이라는 것이다. 자신을 객관화시키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니지만, 어리석어지고 싶지 않다면 냉정을 되도록 빨리 찾아야 하지 않을까.

 사람 일이란 아무도 모르는 일. 한 번 사랑하면 영원한가?. 사랑이란 게 불변하는 건가?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사랑도 얼마든 변하는 거다. 변하는 걸 배신이라 한다면 사랑이란 것이 불변한다는 전제가 깔린 완벽한 관념일 뿐이다. 사랑, 우정, 의리, 얼마든지 변할 수 있고, 이것이 변했을 때 그냥 그 변화를 인정하는 것 그게 성숙한 인간 아닐까. 물론 감정이 있는 인간이니까 왜 아프지 않겠는가. 그러나 모든 게 변하는 게 인생사라면 사랑도 그중에 하나일 뿐이다. 인간이라면 누구에게 사랑의 상처를 줄 수도 있고, 누구에게 사랑의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 누구도 아프게 하지 않고 살고 싶다는 것은, 불완전자고 부조리한 인간이란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아프지 않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그러나 자의든 타의든, 누구도 아픔 없이 세상을 살 수 없다.

 실존 자체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 만큼 크나큰 사랑의 상처도, 결국 세월이 지나면 추억이 된다. 다만 잘 견디고 이겨내는 게 중요할 뿐이다. 이 세상에 이겨내지 못할 상처는 없다. 다만 극복할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미련이나 집착은 인간의 감정이 언제나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태도 때문에 나온 것이리라. 나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거부할 수 있고 다른 사람도 나의 마음을 거부할 수 있다는 전제가 자연스럽게 용납된다면, 우리는 집착과 미련에서 좀 더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소유욕이 만들어낸 철창에 사랑을 가두지 않는다면 말이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다. 사랑은 함께 가는 것이지 내가 갖고 가는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의 소유권은 독점이 아닌 공동소유임으로.

 

 정리하면 사랑의 상처는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승화의 대상이다. 이 상처는 물리적으로 도려내거나 지울 수 있는 게 아니기에 안고 가야 할 것이다. 두고두고 아니, 평생을 아프게 할지도 모른다. 다만 이 상처로 인해 자신이 계속 깊어질 수 있다면, 뼈아픈 사랑의 상처 하나쯤 있어도 무방하리라. 자신의 내면적 성숙을 돕는 상처라면 나쁘지 않으리라. 상처를 승화시켜 인생과 인간에 대한 이해가 넓어질 수 있다면 말이다.

 

 

 

 대개 남녀의 사랑은 사회적으로 결혼이란 제도로 수렴된다. 그 사랑이 아무리 대단하고 거창했어도 얼마나 행복한 결혼생활을 영위하느냐가 관건이다. 연애 기간보다 결혼생활이 중요하다는 건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연애 기간에는 삶의 기반이 독자적이라서 부딪히거나 갈등할 일이 별로 없다. 각기 자신들의 단점을 감추거나 포장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때의 연인은 얼마든지 미화될 수 있다. 한없이 관대하고 이타적일 수 있으므로 매혹적이다. 그러나 결혼은 서로 독립적이던 생활 기반이 하나로 합쳐지는데 여기에서 많은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감추거나 포장했던 단점들이 그대로 드러난다. 사소한 것들에서 갈등이 시작되고 점점 심각해진다. 또 결혼은 함께 삶의 전선으로 나서야 한다. 꿈결처럼 즐겁고 기쁘던 시간에서 먹고 살기 위한 치사한 전쟁의 시간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고로 연애와 결혼은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르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좋은 사상(思想)일지라도 정치를 통해 현실로 구현해내지 못하면 공상이 되는 것처럼, 멋진 사랑도 결혼을 통해 그 가치와 기쁨을 성취해내지 못하면 한낮 불장난이 되고 말 것이다. 연애가 제아무리 극적이고 감동적이어도 이것은 사랑의 과정일 뿐 완성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랑의 결과물은 결혼을 통해 각자 자신들이 꿈꿨던 이상을 직업으로 실현하든지, 아니면 아이를 낳아 잘 양육하든지, 그것도 아니면 둘이 취미생활 하며 알콩달콩 재미있게 살아가는 게 아닐까.

 

 사랑을 위해 왕위를 버린 영국 왕 에드워드 8(1894-1972), 1936141세 나이로 대영제국 왕위에 오르지만 독신이었다. 그런데 이 왕이 마음에 둔 여성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월리스 심프슨 부인이었다. 그녀는 이혼 경력이 있는 미국인이었다.

 왕비로서는 적합하지 않다고, 왕실이나 국교회(國敎會)나 의회나 여러 자치령이나 모두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왕은 왕위보다는 사랑을 택하기로 결심한다. 이해 1210, 왕은 라디오를 통해 "나는 사랑하는 여성의 조력 없이는 왕으로서의 의무를 완수할 수 없을 것이다."라며 재위 11개월 만에 퇴위를 선언하고, 왕위를 동생인 조지 6(현재 엘리자베스 여왕의 아버지)에게 물려준다. 그리고 '윈저 공'이 된 에드워드 8세 전 왕은 그 이듬해 이혼한 심프슨 부인과 정식으로 결혼한다.

 이 사건은 '왕관을 건 사랑'이라 해서 영국뿐 아니라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다. 그런데 이런 세기의 사랑도 막상 결혼생활에선 행복하지 않았다고 한다. 왜일까. 이들의 결혼생활은 왜 행복하지 못했을까? 연애와 결혼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남녀 사이에 사랑의 조건이란 게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

 남녀 간의 사랑을 소비재와 생산재로 나눌 수 있다면, 소비재는 외모. 학벌. 집안. 사회적 지위 등이 속할 것 같고, 생산재는 내면적 매력과 정서적 공감대나 감성적 교감이 여기에 속할 것 같다. 내면적 매력이란 자세하게 말하면 그 사람의 지적 수준과 교양, 감수성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싶다.

 대부분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이유는 인간적인 호감과 여성의 아름다운 얼굴이나 몸매, 또는 남자가 가진 지위나 능력 같은 것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 외적인 매력만으로도 불같은 사랑에 빠질 수 있고 모든 걸 걸 수 있다. 이게 바로 사랑이 한낮 환상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하는 요인이다. 인간적 호감, 아름답거나 멋진 외모, 능력 따위의 매력들은 근본적인 게 아니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렇다면 근본적인 게 무엇일까. 그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외면으론 드러나지 않는 내면적 매력일 것이다.

 사랑하고 결혼해서 살다 보면 처음엔 흡입력이 강했던 외모. 학벌. 지위 등에 무덤덤해질 수밖에 없다. 즉 이런 매력은 소비되는 한시적인 것이다.

 에드워드 8세와 심프슨 부인은 서로의 외적 매력과 인간적 호감에 빠져 결혼하진 않았을까? 대영제국의 왕세자라는 에드워드 8세의 지위. 심프슨 부인의 유머와 뛰어나 언변, 패션 등에 이끌려 서로 사랑하게 됐고 결혼하게 되었다면 불행할 개연성은 충분하다. 혹시 살면서 내면적으론 영혼의 교감 같은 게 불가능한 사람들은 아니었을까. 정서적 공감대가 형성되는 부분도 매우 협소하여 느낌도 서로 다르고 생각도 다른 자신들의 내면을 발견하진 않았을까. 이를테면 취미도 다르고 취향도 다르고 세상을 보는 눈도 다른 사람들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이들은 세기의 사랑이라지만 충분히 불행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태어나고 자란 성장배경이 전혀 다른 남녀가 서로 취미도 비슷하고 관심사도 비슷하고 특히나 느낌이 비슷할 때 맞보는 경이감과 일체감이란 신기하기 이를 데 없으며, 여기서 맞보는 충만감이란 서로가 영혼의 동반자라는 희열을 만끽하게 될 것이다. 이런 것들은 생산재라 할 수 있는 내면적 매력에서 나오는 것들이며, 퍼내고 퍼내도 항상 맑고 시원한 물이 샘솟는 샘물과 같아서 지겨울 일이 없을 것이다.

 남녀 사이에 내면적 매력이 왜 중요하냐면 그것이 바로 일체감을 맞볼 수 있는 유일한 단서이기 때문이다. 둘만의 일체감은 곧 충만감으로 이어진다. ‘. 이 사람과 결혼 정말 잘했어!’ 란 감사의 마음이 저절로 나올 것이다. 남녀 사이에 정서적 일체감을 맛볼 수 없을 때 그들은 곧 권태기에 접어들 것이다. 둘은 점점 무관심해질 것이다. 대화는 없어지고 관성이나 습관으로 결혼생활은 이어질 것이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슬픈 일이다.

 청춘의 사랑이든 중년의 사랑이든, 배운 자의 사랑이든 못 배운 자의 사랑이든, 부자의 사랑이든 가난한 자의 사랑이든, 아니 왕관과 맞바꾼 사랑일지라도, 이 세상 모든 남녀의 사랑은 한순간도 완성되는 결과물이 아니다. 죽을 때까지 완성을 이루어가는 미완의 보석일 뿐이다. 그래서 사랑은 숭고한 것이지만 지난한 것이다.

 에드워드 8세의 '왕관을 건 사랑'처럼, 암만 연애가 아름다워도, 일상에서 그 아름다움을 계속 이어가야만 하는 게 사랑이다. 그래서 사랑이 어려운 것이다.

 "Someone Like You"의 연인도 떠났기에 더 아프고 애틋한 것이다. 그가 정말 결혼해서 살았다면 그토록 떠난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남을까?

 "Someone Like You"를 몇 개월째 들으며  사랑에 대한 상념사랑의 상처에 깊이 침잠하는 요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