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와 바둑

 

 

 

 텍사스 어스틴에서의 일상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8시 출근 6시 퇴근이 기본이다. 미국은 퇴근 후 친구를 만나거나 회사 동료와 술 한잔을 하거나 하는 일이 아예 없다.

 가족들이 다 같이 저녁을 먹은 후론 각자의 시간을 보낸다. 나는 주로 바둑을 한 두 판 두고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다 늦게 자는 편이다. 반대로 아내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다.

 인터넷 바둑 일단 기력이지만 바둑 두는 것은 하루도 빠지지 않는 나의 일상이다. 오늘도 첫판은 한집 반으로 신승하고 둘째 판을 둔다. 반상에서 바둑알은 둥근 모양처럼 그 영향력을 사방팔방으로 발휘한다. 전후좌우가 따로 없다. 실리를 챙기다가 중앙의 대마가 미생이되 곤란을 겪고 있을 때, 난데없이 언어(言語)도 바둑알과 같지 않을까? 생각하게 됐다. 언어란 관념을 구상화시킨다면 정사각형 벽돌이 아니라 바둑알 같을 거란 얘기다. 이것은 언어의 의미가 하나에 고착되지 못하고 무한 미끄러진다는 언어의 불완전성에서 기인하는 것이지만, 반대로 언어의 창조성이 유래 되는 이유일지 모른다.

 

 아내는 신중하다’. 사전적 의미처럼 가볍게 행동하지 않고 조심스럽다’. 그러나 신중하다는 말의 사방팔방을 보면 소심하고 과감성이 부족하고 모험심이 없으며 변화를 두려워한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다.

 아들은 대범하다사전적으로는 성격이나 태도가 사소한 것에 얽매이지 않으며 너그럽다.’라는 뜻이다. 하지 이 대범함이란 말속에는 섬세하지 않고 무모하며 치밀하지 않다는 뜻도 들어있다.

 또한 아들은 민첩하다’. 모든 일을 망설임 없이 속전속결 하여 시원시원하지만, 민첩하다는 속뜻은 깊이 생각하지 않으며, 거칠고 실수를 많이 한다는 것도 된다. 이처럼 단어는 사전적 의미만 다가 아니라, 그 이면에 숨어 있는 뜻도 많다.

 보통 단어를 말하면 대개는 습관적으로 사전적 의미만 떠올리며 한정 지으려 한다. 이것은 언어는 완전한 것으로 실재를 반영한다는 플라톤의 잘못된 언어관을 이천여 년 동안 학습해왔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언어는 불완전한 것으로 실재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는, 백여 년 전 소쉬르(스위스. 언어학자)의 언어학적 성취를 체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강아지란 단어를 보면 우리는 똑같은 강아지를 떠올리는 게 아니다. 난 강아지 하면 항상 우리 집 개를 생각할 테고, 다른 사람 역시 강아지 하면 자기 집에서 키우는 개를 떠올릴 것이다. 내가 떠올리는 강아지와 다른 사람이 떠올리는 강아지가 다르다. 이처럼 모든 단어는 절대로 현실에 존재하는 특정 지시대상을 가리킬 수 없다. 단어와 지시대상과 일 대 일의 적확한 대응이 되지 못하고 의미가 수없이 확산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강아지라는 단어를 보고 떠올리는 것은, 실존하는 지시대상이 아닌 개념(이미지)일 뿐이다.

 ‘강아지라는 단어는 실재 강아지를 반영한다는 플라톤의 그릇된 언어관이 언어를 절대화시켰다고 한다. 문자의 권위는 여기에 기반한다. 그러나 소쉬르는, ‘강아지라는 단어는 실재를 반영하는 게 아니라 이미지(개념)만 나타내는, 자음과 모음이 결합한 부호일 뿐이라는 진실을 찾아낸다. 이 천년 넘게 이어져 오던 문자의 절대적 권위가 무너지는 순간이다.

 과학은 이론값과 실험값이 일치한다. 그래서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는다. 자의적 해석이 끼어들 틈이 없다. 반면 불경이든 코란이든 성경이든 저마다 해석하는 게 다르다. 왜냐면 언어라는 자체가, 관념(이미지)이라서 자의성이 개입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교리는 하나인데 각각 받아들이는 게 차이가 난다. 여기에서 소승 불교. 대승 불교. 수니파. 시아파. 감리교. 장로교 등등 교파가 갈리게 되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이것은 언어가 지닌 불완전성 때문에 필연적으로 생기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심지어 유사 종교가 발생하기도 한다. 문자로 이론의 여지가 없는, 절대 진리를 담으려 했던 오류는 언어학적 무지에서 온 것이리라이 글의 취지는 언어의 기능적 한계, 그 불완전성을 안식하자는 데 있지, 언어 자체를 폄하하자는 데 있지 않다. 인간은 언어란 도구로

추상적 관념체계를 세울 수 있어서 비약적으로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한 말이다. 아는 만큼 생각하고,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리라.

 오늘날, 절대적 진리가 상대적 진리로 바뀐 배경도 소쉬르의 언어학적 성과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언어가 완벽한 것이라면 듣는 사람 모두 하나로만 해석되어야 한다. 그럴 수 없는 것은, 언어가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인간사에 오해가 난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이 언어의 불완전성은 곧 언어의 확장성을 내포한다. 이는 언어가 사실성을 추구하기엔 대단히 문제가 많은 도구이지만, 예술성을 추구하기엔 문제가 전혀 없는 도구라 할 수 있다. 언어의 불완전성은 온전히 언어의 예술성으로 귀결되는 듯하다. 알 듯 모를 듯, 긴 듯 아닌 듯, 현실인 듯 비현실인 듯, 몽롱하고 몽환적인 시()를 읽어 본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이와 같은 언어의 불완전성은 모호성과 다의성으로 요약된다. 이는 단어를 사전에 가둘 수 없다는 뜻도 된다. 그러고 보니, 시어의 특징 중에 모호성과 다의성이 있다. 시는 언어의 불완전성을 가장 창의적이고 적극적으로 차용한 것 같다.

 

 하루는 갑자기 아내가 왜 자기에게 이쁘다는 소리를 한 번도 안하느냐고 물었다. 참으로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물론 아내의 물음 속엔 고지식하고 낭만적이지 못한, 나에 대한 아쉬움이 숨어 있을 것이다. 때론 달콤한 애정 표현도 듣고 싶었겠지만, 쑥스러워서 그런 걸 못 하니 어찌하겠는가.

 이에 대한 합리화나 변명을 하자면이쁘다의 사전적 의미는 눈으로 보기에 좋고 사랑스럽다이다. 남녀의 수직적 관계가 숨어 있다. 인간으로 동등한 관계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다. 사내가 여자를 일방적으로 귀여워하는 시혜적 관점이 감춰져 있다. 혹 아내에게 애첩 기질이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나는 아내를 존중하고 존경하지, 이쁘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아내의 여성스러운 매력을 모른다는 뜻이 아니다. 아내는 피부가 유난히 희고 깨끗해 단정해 보이는 사람이다. 단아한 몸피도 여성으로의 매력이 충분하다. 그러나 나는 아내와 동등한 인격체로서 감히 이쁘다란 말은 떠올릴 수 없었다. 사대부들이 기생에게나 쓰던 말 같고, 음탕한 자들이 직간접적으로 성적 호기심을 채울 수 있는 여자들에게 추파처럼 던지는 말 같았다. ‘이쁘다는 말속에는 성적으로 소비되는 여자만 있지 여성이란 인간, 인격체는 없다.

 이상은 이쁘다라는 말에 대한, 나의 편협하고 일방적인 반응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좀 더 넓게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아름답다란 말은 비슷하지만 분명 다르다. 이것은 성적이기보다는 인격적인 의미를 많이 담보하기 때문이다. ‘이쁘다는 말은 여성에게만 국한되지만 아름답다는 말은 남성도 아우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사람은 여성도 되지만 남성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언어의 양면성이다. 즉 겉뜻과 속뜻, 앞모습과 뒷모습이 매우 다르다. 시사하는 바는 의미가 고정되지 않고 끝없이 확대되는 단어의 불완전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의 언어생활은 풍요로워질 것이다. 또 사람 말(문자)은 믿을 게 못 된다는 것을 알면 인간에게 그다지 실망할 일도 없을 것이다.

 각설하고, 사전은 언어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을 제한한다는 것을 뜻밖에도 바둑을 두며 깨닫는다단어에 대한 사전의 기본적 정의는 중요하나 거기에 갇혀서는 안 된다햇살처럼 퍼져갈 수 있는 언어의 울림을 파괴한다는 것, 더 넓게 확장될 수 있는 언어의 의미망을 차단한다는 것이다.

 

 

 아차, 대마는 미생인데 초읽기까지 걸리니 어쩔 도리 없이 돌을 던져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