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피올라니 공원 '한국축제한마당'

 

 

 

 와이키키 해변 옆에 있는 카피올라니 공원에서 '한국축제한마당'이 열렸다. 한국 문화를 지역 사회에 알리는 한국인들의 축제다. 교포는 물론이지만, 한류열풍을 타고 현지인들의 참여도 높았다. 멀지 않아 하와이 지역사회의 커다란 축제로 자리매김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한국축제한마당', 코리언 페스티벌은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축제가 아니라 잔치가 아니라 고국을 멀리 떠나 타국에서 사는 사람들이 외로움을 달래려, 한자리에 모인 거란 생각이 들면서 울컥했다.

 

 한국에서 초청된 무용단이 공연을 했다. 현대무용의 어머니라는 이사도라 덩컨을 언뜻 들어 본 적은 있어도, 실제 춤을 가까이서 본 건 생전 처음이니 얼마나 무용에 문외한인가. , 한국 현대무용의 개척자라는 최승희는 얼핏 알아도 정말 부끄럽지만, 지금까지 우리 춤도 한 번 본 적이 없다.

 세미클래식 발레라고 해야 할지, 퓨전 무용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대중성을 고려한 것만은 틀림없었다.

무용의 배경음악은 영화 타이타닉의 주제곡 “My Heart Will Go on”이었다. 이것을 부른 셀린 디온의 가을 하늘같이 높고 청아한 목소리엔 왠지 모를 슬픔이 있다.

 그 맑은 슬픔 - 그리움 같기도 하고 향수 같기도 한 슬픔. 맑고 고운데 슬픔이 있다는 건 이율배반적이다.

 노래에 따라 무용수들의 몸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가녀린 몸은 천천히, 빨리, 가만가만 움직이다 때론 격정적이기도 했다.

 그동안 인간이 슬픔을 표현할 수 있는 건 눈물과 울음소리가 다라 여겼다. 그러나 오늘에야 인간이 슬픔을 표현할 수 있는 건, 몸도 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손끝, , 머리, 가슴, , 다리, 발끝까지 모두가 슬픔을 표현하는 도구였다. 음악에 맞춰 뛰는듯하기도 하고 나는듯하기도 하고 구르는듯하기도 한 몸짓은, 너무도 처연해 나를 아프게 했다.

 인간의 슬픔을 말과 문자로 표현하는 건 얼마만큼의 과대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몸은 어떠한 수식도 동원할 수 없기에 슬픔을 과장하지 못한다. 슬픔을 있는 그대로 오직 온몸으로 표현할 뿐이다. 따라서 몸의 정직성은 어떤 슬픔도 신뢰할 수 있다.

 온몸으로 표현하는 슬픔은 순결해 보였다. 아니 숭고해 보였다. 몸이 순결하고 숭고해 보인 건지 슬픔이 순결하고 숭고해 보인 건지 명확하게 구분은 할 수 없었다.

 슬픔을 표현하는 몸이 순결해 보여 슬픔까지 순결해 보였고 그 몸이 숭고해 슬픔까지 숭고해 보였으리라.

 예술은 인간에게 내재되어있는 표현 욕구에서 기인했다고 한다. 그런데 예술이 표현하는 대부분은 슬픔에 집중되어 있는 것 같다. 슬픔의 정체는 무엇이며 예술은 왜 이것을 부여잡고 있을까?

 

 인간은 태어나 성장하면서 상처를 입는다. 이 상처는 내면화돼 욕망으로 자리 잡는다고도 한다. 인간에게 상처는 숙명이다. 그러나 사람이란 무정한 동물이 아니고 유정한 동물이라서, 상처를 외면하거나 방치하곤 못 산다. 지울 수 없기에 상처를 보듬고 어루만져 주어야만 정상적으로 살 수 있다. 그 상처를 보듬고 어루만져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예술 아닐까? 이를 담당하는 예술가는 세상 온갖 상처에 대한 씻김굿을 하는 당골무당 일지 모른다. 슬픔의 실체가 상처라면 예술로 표현되는 슬픔을 통해 사람들은 서로 위로해 주고 위로 받는 것이다. , 공감과 소통을 통해 이해하고 이해해 주면서 서로에게 힘이 되는 것이다. 여과 없는 감정 폭발이 아니라 예술로 승화된 슬픔은 그래서 고결하고 위대할 수 있는 것이다.

 발레리나 혹은 무용수, 인간의 몸을 직접 예술화하는 예술가. 그들의 몸짓 하나하나에 깊은 감명과 넘치는 위로를 받은 하루다.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사족 하나:

 몸매가 거의 다 드러나는 무용수의 의상은 성적 호기심을 채워 주기 위해 입은 게 아니라, 몸의 언어를 명징하게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란 것도 깨달았다.

 관능적일 수도 있으나 무용수의 몸이 관능을 자극하진 않았다. 한없이 아름답고 오히려 정결해 보일 뿐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