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디 산의 돌
LA 인근에 ‘발디’라는 산이 있다. LA에 거주하는 한국 산악인들에게 발디는 북한산으로 불린다고 한다. 발디 높이가 3,068m이니, 835m에 불과한 북한산과 비교할 대상은 아니지만 거의 서울 전역에서 북한산을 볼 수 있듯, 발디봉 역시 LA 어디에서나 볼 수 있기 때문이란다.
늦은 겨울이라 해도 되고, 이른 봄이라 해도 되고, 양자역학 용어론 “중첩”이라 해도 무방한 토요일 날. 발디 산을 왕복 세 시간 정도만 등산할 요량이었다. 햇빛은 찬란하고 따스했으나, 바람은 투명하고 꽤 차가웠다.
산행을 하다가 돌을 잘못 밟아 미끄러졌다. 다행히 크게 넘어진 것은 아니었으나 식겁했다. 친구에게 넘어진 김에 쉬어가자고 하니 그러자 했다.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길이 아니니 그 자리에 널브러져 앉은들 민폐가 될 일은 없었다. 배낭에서 가지고 온 오이를 꺼내 친구와 나누어 먹으며, 무심코 내가 밟았던 돌을 보았다. 아뿔싸,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초등학교 오 학년 무렵 우리 집 바깥마당 한 귀퉁이엔 축대를 쌓고 남은 돌무더기가 있었다. 초여름쯤이었다. 윗집 형과 돌을 갖고 놀았는데 그 모양이 자루만 붙어 있으면 장작을 쪼개도 될 것 같은 영락없는 도끼 같았다. 날카롭게 날 선 것이 위험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모양이 신묘한 탓에 악동들은 이걸 갖고 놀았고 그만, 내 팔이 열 바늘이나 꿰매는 큰 부상을 당했다.
옆 동네에 진짜 의사는 아니었으나 김 의사라는 분이 사셨다. 병원도 없는 시골 마을에 의사가 있을 리 만무하지만, 이분은 농고를 졸업하고 아버지와 과수 농사를 짓다 군대 가서 의무병이 되고 월남 파병이 되었단다. 의사가 절대 부족한 전쟁터에서 군의관이 시키는 대로 부상병들을 직접 수술했다고 한다. 얼마나 많이 했는지 나중엔 수술 속도가 진짜 의사인 군의관과 비슷했다 한다.
하여튼 돌쇠 같은 이분은 인근 마을 사람들에겐 없어선 안 될 귀중한 존재였다. 농사 일 하다가 다치거나 감기. 몸살 등 어지간하면 다 이분에게로 갔다. 지금으로 치면 불법 의료행위지만 공공의료시설이 충분히 확보되지 않았던 70년대, 의료공백을 훌륭하게 메꾸어 주었던 분이 아닌가 싶다. 더더욱 이분은 치료해주고도 돈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마움에 보리. 콩. 고구마 등등을 갖다 주거나, 또는 김 의사 과수 농사일을 직접 거들어 주는 등, 자기 형편대로 감사 표시를 했다 한다.
아버지와 김 의사분이 내 두 다리와 팔을 끈으로 꼭꼭 묶고 입에는 손수건을 물리고는 생으로 열 바늘을 꿰매었다. 얼마나 아팠는지는 지금 생각해도 치가 떨린다. 마취 안 하고 수술하면 빨리 낳고 흉터가 조금밖에 남지 않는다고 했다. 추측하건데 마취제가 없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가. 실제로 내 팔에는 흉터가 조금 남아있다.
그 돌 모양과 지금 내 발밑에 있는 돌 모양이 너무나 똑같았다. 50여 년 만에 보게 되는 돌이지만 그 형태며 질감이며 색감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암갈색이라 해도 좋고 적갈색이라 해도 상관없다. 예나 지금이나 장작을 패도 될 만큼 서슬 퍼렇게 날이 서 있는 것도 변함이 없다. 어쩌다 이 돌이 여기 아니, 미국까지 왔나 싶어 신기하기까지 했다. 그 사고로 나는 부모님에게 엄청나게 혼났다. 너무도 미웠고 원망스러웠던 돌이었는데, 오래간만에 뜻밖의 곳에서 만나니 희한하게 반가웠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흉터가 남을 미움이나 원망도 세월이 지나니 용서가 된단 말인가. 세월이 약이란 말은, 죽을 것 같이 힘든 일도 반드시 아무니까, 사실은 별 게 아니란 말인가.
내가 그 돌을 주워 가방에 넣으려 하니 친구가 깜짝 놀라며, 왜 그 위험하게 생긴 돌을 가방에 넣어 가냐고 물었다.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우리 집 화단에 잘 모셔 놓으려 한다네.” 그리고 “혹시, 밉고 용서 못 할 사람이 생기면 이 돌을 보며 지나고 나면 별 게 아니야, 그러니 거기에 얽매이지 말고 대범 하라고, 너그러워지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오라, 사연 있는 돌이니 반면교사로 삼으시겠다. 좋은 생각이군.”이라며 친구가 맞장구쳐주었다.
아무리 발길에 차이는 게 돌이라지만 때론 값지고 의미 있는 돌도 있었다.
우선 원시인들에겐 요긴한 생활 도구였고, 내 어릴 적, 마을을 드나들 때마다 애건 어른이건 이웃의 안녕을 빌며 서낭당 당산나무 옆에 던지던 소원의 돌은 흔할지라도 고귀했다.
임진왜란 중 행주대첩 때 권율 장군을 도왔던 아낙들 행주치마 속에 있었던 구국의 돌은 숭고했다.
80년대 전두환 군부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를 외치며 던지던 대학생들의 돌과, 강자 골리앗과 맞짱 뜨던 약자 다윗의 돌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달랐을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저 여인을 돌로 쳐라" 일갈했던, 통렬한 자기 성찰을 촉구하던 예수의 돌은 고결했다.
이 모든 돌 들은 지금도 어느 광장 땅속이든, 냇가든, 들판이든, 산기슭이든, 어딘가엔 있을 것이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너는/누구에게 한 번이라도/뜨거운 사람이었느냐.”는 안도현의 시가 떠오른다. 나는 지금까지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의미 있는 돌이 되었던 적 있었던가? 부끄럽게도 나 자신과 가족의 안위만 살피며 살아왔다. 돌이켜 보면 김 의사 같은 분이 “뜨거운 사람”이거나 “의미 있는 돌” 같은 존재가 아니었나 싶다.
높고 푸르른 발디산에서 돌에 너머져 큰 일이 날뻔 했는데 그것은 옛날 어릴 적 돌을가지고 놀다가 다친 기억을 연상시켰군요.
그 미웠고 원망스러웠던 돌도 세월이 지나니 그런 감정이 없어지고 용서가 되듯이 그래서 그 돌을 집에 가져가서 힘들거나 용서 못 할 사람이 생기면 그 돌을 쳐다보며 이겨나가리라는 것은 특별하게 느껴지네요. 우리 역사에 많은 돌이 있지만 그 돌이 바르게 쓰일 때 아름다운 세상이 된다는 것,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