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마커스 웰비
유숙자
얼마 전 TV에서 L 교수를 보았다.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피부과학계의 선두를 달리더니 드디어 과학에 근거를 둔 화장품과 피부치료제를 개발하여 판촉차 LA에 온 것 같다. 환자에게 의술과 인술을 펴던 L교수가 드디어 발명품까지 고안해 낸 것이다. 처음부터 범상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삶의 한 획을 긋는 큰일을 해 냈다. 그동안 세월이 적지 아니 흘러 L교수의 모습도 많이 변해 있었다.
내가 그를 알게 된 것은 30여 년 전이다. 독일 뮌헨 대학에서 막 귀국하여 한국 피부과학계의 권위자로 부각될 즈음이다. 그해, 나는 원인 모를 탈모증으로 L교수의 진료실을 찾았다. L 교수는 나를 보자 “추운 날씨에 멀리서 오시느라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하며 의자를 당겨 주었다. 당시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화곡동에서 살았었기에 차트에 있는 주소를 보고 하는 말 같았다.
그의 인사는 나에게 가히 충격적이었다. 의사란 환자의 위치에서 보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 우리가 그렇게 여기기 이전에 의사 자신들이 대단한 프라이드를 갖고 있기에 대학병원의 의사들에게는 말도 걸기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존경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의 겸손과 친절의 미덕이, 인품을 격상시킨다는 것을 그때 보았다. 병의 경중을 막론하고 환자는 예민해 있기에 의사의 한 마디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치료받기 이전의 따뜻한 한 마디로 원형 탈모증 부위에서 머리가 까맣게 돋아나는 체험을 했다.
오래 전 한국에서 “마커스 웰비”라는 미국 드라마를 시청한 적이 있다. 닥터 웰비가 병원에서 환자를 치료하며 보살피는 모습을 시리즈로 엮어서 만든 드라마였다. 닥터 웰비가 환자를 치료하는 태도가 어찌나 진지하고 정성스럽던지 드라마를 보는 사람이 많은 감동을 하게 한다. 환자 곁에서 친절하게 돌봐주고 퇴원한 후에도 환자의 상태를 보려고 집으로 찾아간다. 때로 환자가 반항하고 대들고 제멋대로 행동해도 개의치 않고 한결같이 감싸주고 품어주고 다독인다. 어떻게 의사에게 반항할까. 절대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의사가 저렇듯 겸손하게 환자를 대할 수도 있구나 하며 선진국 의사의 사명감에 존경과 부러움을 표했다.
마침내 나는 닥터 웰비가 사는 미국으로 오게 되었다. 여기저기 내게 필요한 의사를 찾아 나섰으나 웰비 같은 분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시간을 예약하고 가도 진료실에는 많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어 질리게 하였고 의사는 환자를 진료실 두세 곳에 동시에 앉혀 놓고 이방 저 방을 들락거렸다. 처방전을 받아와도 혹시 처방이 바뀐 것이나 아닐까 하는 의아심이 들 정도로 환자가 북적거렸고 빠르게 환자들을 진료했다. 진료시간은 거의 10분을 넘지 않는다. 차분히 묻고 답을 기다리기에는 주변이 너무 산만해서 묻고 싶은 말도 잊고 오기 일쑤였다. 미국에서 진료하는 의사들은 모두 웰비 같은 줄 알았던 것은 착각이었다.
살아가며 우리는 각인각색의 사람을 만나게 된다. 오래 사귀지 않았어도 말씨나 행동을 보면 그 사람의 인품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몸에 밴 친절이나 겸손한 모습을 대하게 될 때 세상이 환해지고 삶이 아름답게조차 보인다. 이 따뜻한 사람이 진료도 잘한다는 것을 체험했기에 나는 인술도 펼 줄 아는 의사를 만나고 싶었다.
몇 년을 지나는 동안에 난초의 향기처럼 저절로, 먼 곳까지 소문이 풍겨오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남다른 사명감을 가지고 신중하게 환자를 대하는 귀한 분, 치과 의사 K와 내과 의사 C가 내가 만난 닥터 웰비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매우 친절하고 자상하다는 점이다. 처음 만나도 오래 알고 지낸 분 같이 서먹함이 없다. 같은 의사 사이에서도 인정하는 의술과 인술을 동시에 펴는 분으로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정성껏 진료한다. 자칫 불안해 하기 쉬운 치과 진료나 광범위한 내과 진료를 편안하게 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정해진 시간 내에 소화할 수 있는 환자만 수용하여 그 진료실에서는 기다림이 없다. 환자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어 궁금한 것이 없을 때까지 상세히 설명하고 물음에 답해 준다. 그들의 진료실에는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흐른다. 자칫 경직되기 쉬운 진료실 분위기가 음악으로 인해 긴장이 풀리고 안정감을 주어 좋다. 의사는 많은 환자를 대하기에 피곤하기 쉽다. 그럼에도 이 분들은 환자의 입장이 되어 이해하고 최선을 다하는 진실함 때문에 명성을 얻는 것이리라.
의사도 직업의 한 부류에 속하나 존경받는 위치에 있는 것은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그 마음속에 인자와 긍휼히 없이 베풀어지는 의술은 기술에 불과 할 뿐이다. 남달리 어려운 공부를 하여 펼치는 의술. 베풀면서 얻어지는 보람과 만족, 행복감의 높은 가치를 스스로 만끽할 수 있는 아름다운 의사들. 이런 분이 우리 주변에 많았으면 하는 바람을 욕심껏 가져본다.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