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너 유감
유숙자
행여 늦을세라 가슴 졸여가며 달려왔는데 공연장으로 들어가는 문은 철옹성 같이 닫혀 있었다. 발렌시아에서 코스타메사 Performing Arts Center까지 80여 마일이 넘는 길이라 두 시간 전에 떠났건만 2분 지각이었다.
얼마나 기다리던 공연이었나. 로열 발레가 신드렐라를 가지고 남가주를 방문하여 내 마음은 충분히 들떠 있었다. 두어 달 전부터 표를 사 놓고 흐뭇했는데 불과 2분 때문에 리셉션 룸에 서서 모니터로 1막을 관람했다.
미국으로 오기 전 나는 유럽에서 좋은 공연을 많이 관람했다. 공연장 매너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같겠으나 특히 유럽은 '정장이 아니면 입장 불가'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모두 성장을 하고 온다. 그것은 자신들의 매너이며 공연자에 대한 예의인 탓이다. 공연 15분 전이면 객석이 거의 채워진다. 또한, 1분의 오차도 없이 정시에 시작하고 공연 도중 들어간다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한인들이 많이 사는 LA에 와서 공연문화에 새로운 면을 보게 되었다. 한인들의 공연을 보면 15분에서 20여 분 늦게 시작하는 것이 예사이고 공연 중인데도 관람자가 어정어정 걸어 들어오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늘 하는 말 “휴대전화는 꺼주세요.” 해도 공연 도중 벨 소리가 들린다. 급하게 올 연락이 있으면 아예 공연을 포기하든지 아니면 두세 시간 만큼은 자신을 위해 할애할 것이지 대중이 모이는 장소에서 무례한 일들이 좀처럼 고쳐지질 않음이 유감스럽다.
일반적으로 오페라나 발레는 그날 공연할 작품을 미리 주최 측에서 해설해 준다. 공연 시간 1시간 전에 오면 약 30분가량 작품의 성격, 내용 등 관람자가 편하게 이해되도록 도와준다. 집에서 줄거리를 훑어보고 음악도 한 번쯤 듣고 공연에 임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으나 그런 여건이 되지 않는다면 조금 일찍 도착하여 해설도 듣고 프로그램을 차분히 읽어보면 관람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친지나 가족이 출연할 경우 그 순서가 끝나기가 무섭게 자리를 뜨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공연의 예의는 끝까지 관람하는 데 있다. 아는 사람이나 마음에 드는 공연만 골라가며 관람한다면 실례가 아닐까.
지난 11월 6일에 Scottish Auditorium에서 열렸던 “세계 평화 대 음악회”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1부의 마지막 순서로 한동일 씨가 베토벤의 피아노협주곡 황제 1악장을 연주했다. 휴식 시간이 되자 이 층에서 관람하던 한인들이 대거 아래 층 빈자리를 찾아 내려왔고 더러는 공연장을 떠났다. 우리들의 조급성은 결혼식장에서 특히 잘 나타난다. 간혹 신랑 신부가 늦게 들어올 경우, 기다려주지 않고 이미 식사를 시작하고 끝나기 무섭게 자리를 뜬다.
작은아들이 결혼할 때였다. 신붓감이 미국 아이라 이곳의 관례대로 신부측에서 결혼식을 주관했다. 미국식은 신부 측이 결혼 일체를 도맡고 신랑 측은 청첩장만 받아 온다. 모두가 바쁜 12월 셋째 주, 크리스마스 일주일 전에 샌타바바라에서 예식을 거행했기 에 나는 측근에게 스물다섯 장의 청첩을 보냈다. 우리 측 자리에는 50여 명의 하객이 참석했다.
결혼식을 마치고 리셉션이 시작되자 아들에게 각 테이블을 돌며 인사하기를 권했다. 식사가 끝나면 우리 측 손님들이 연회장을 떠날 것을 알고 있기에 미리 귀뜸을 했다. 아들은 “엄마 염려 마세요 나중에 인사하는 순서가 있어요. 그때 할게요” 한다.
식사가 끝나고 나니 신부를 필두로 길게 꼬리를 만들어 춤추고 노래 부르고 재미있는 여흥 순서가 한동안 계속되었다. 신랑 신부가 케이크를 자르고 정중하게 서서 하객 한 사람 한 사람을 맞으며 인사를 나눈다. 손님은 케이크와 차를 들고 다시 자리로 들어간다.
그때 우리 측 손님은 세 쌍 부부들만 남았다. 우리들의 습성을 모르는 아들은 “왜 모두 가셨지?” 하고 의아해했다. 예식이 완전히 끝나 신랑 신부가 신혼여행을 떠날 때까지 신부측 하객은 한 사람도 자리를 뜬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은 흔히 바쁜 시간에 어떻게 끝까지 남아 있어, 눈도장만 찍고 나오면 되지. 혹자는 밥만 먹고 나와. 이런 말들을 한다. 그 눈도장이라는 것이 남의 행사에는 적용되나 내가 치르는 행사에 다른 사람이 이같이 행동한다면 많이 섭섭할 것이다.
결혼식, 회갑연, 음악회, 출판기념 등의 행사를 주최하는 측은 자신의 행사에서 끝까지 남아 배려해 주는 하객을 감사히 여긴다. 시간과 정성을 들여 참석하는 축하의 자리에서 귀히 대접받을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