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수필처럼
유숙자
서울에서 발간되는 월간 문학지를 구독하다 보니 그 문학지의 회장 이름이 고등학교 시절의 은사님과 같다는 것을 발견했다. 혹시나 하는 궁금증이 일었으나 확인해 볼 용기도 없고 그분이라 한들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많은 졸업생 중에서 나를 기억하고 계실리 만무하여 생각을 접기로 했다.
새 밀레니엄이 시작되는 봄, 이해는 내게도 의미가 있는 해라서 서울 나들이를 갔다. 서울에 머물면서 수소문해 보니 그분이 고등학교 시절의 은사님이신 이상보 선생님이셨다.
4월 중순을 넘어선 서울의 봄은 벚꽃이 흐드러지게 만발했다. 분홍색 꽃 구름이 일어 꽃물결이 출렁이고 꽃 비가 흩날리는 산책로를 나는 꽃을 찾는 나비같이 헤매고 다녔다. 벚꽃은 만개의 화사함도 아름답지만, 낙화의 신비함이 어느 꽃과도 비견되지 않는다. 꽃향기에 취하고 꽃 비로 온몸이 젖어 꽃물이 뚝뚝 흐르는 마음은 사라진 시간 저 너머에 있는 나를 확인하고 싶었다.
“선생님, 저 아무개예요. 기억나세요?”
“그럼 기억하고말고” 기억에 상관없이 이렇게 대답해 주실 것을 기대하며 전화기를 바짝 귀에다 갖다 대었다.
“오, 그래, 가만있자 아마 키가 훤칠하게 컸었지.”
눈물이 핑 돈다. 사실 뭐 그리 목숨 걸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알아주시기를 바랄까 마는 그 순간의 나는 제복을 단정히 입은 10대 소녀 마음이었다.
그때 선생님께서는 고등학교에 갓 입학한 우리에게 고문(古文)을 가르쳤다. 30도 채 안 돼 보이는 새파랗게 젊은 선생님께서 고문을 가르친다는 것이 양복 입고 삿갓 쓴 것 같아 어울리지 않았다. 거기다가 훈육주임이라는 엄한 직책까지 겸하였는데 이 또한 아니올시다였다. 미남형의 깔끔한 외모의 선생님은 영시나 한국의 서정시가 술술 풀려야 제격인 로맨틱한 분위기 쪽이었다. 오히려 우리 꿈 많은 사춘기 소녀들의 고민을 함께 아파하고 이해해 주시는 편이 더 어울릴 것 같은 분이었다.
외모와 달리 고문 시간에 받는 수업과 학습 분위기는 압도적이었다. 고전에서부터 전래동요까지 광범위하게, 어찌나 다양하고 재미있게 예 화를 들어가며 가르치시는지 45분의 수업 시간이 짧게 지나갔다.
시선이 머무는 곳에 수십 년은 족히 되었을 것 같은 고목이 이제 막 푸릇푸릇 새싹을 틔우고 있다. 옛날 여고 시절 신관으로 올라가는 길모퉁이에 우람하게 서 있던 고목 나무가 눈앞에 오버랩 된다. 사르르 사라진 세월 속에 보이는 붉은 벽돌 건물, 창 너머로 흩어지던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그해 학기 말 고문 시험 때 어찌 된 일인지 평소 때보다 시험 성적이 아주 나빴다. 뜻밖에 저조하게 나온 성적을 보시고 선생님은 퍽 의아해하셨다. 분명히 꾸지람을 내리실 것 같아 시험지를 받아 든 나는 몸이 잔뜩 움츠러들었다.
“예술제가 임박해서 공부할 틈이 없었구나. 학년말 시험 때 잘하면 된다.” 이 말씀은 꾸중보다 더 나를 부끄럽게 했다. 기실 고문은 평소 실력으로 해도 충분할 것 같아 책 한번 드려다 보지 않았다. 이렇듯 선생님은 평소 무척 엄하셨음에도 자상하시며 사려 깊은 분이셨다.
부지런히 움직였는데도 약속된 장소에는 선생님께서 먼저와 계셨다. 지난번 전화 통화 때에 음성이 아직도 젊은이 같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뵈니 선생님의 세월은 천천히 가고 있었다. 용모도, 말씀도, 행동도 젊으셨다. 오랜만의 해후는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끝없이 이어졌다. 그날 점심은 내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선생님께서 선불하셔서 오랜만에 스승님 대접할 기회를 잃었다.
평생을 교육계에 몸담고 계시면서 후학들에게 사랑과 열정을 쏟으신 선생님은 고문 학자로 가사 문학 연구와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셨다. 짜장면 교수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짜장면을 즐겨 드셨는데 거기에는 선생님의 제자 사랑과 배려가 깔렸었다. 짜장면을 좋아하셔서가 아니라 대접하는 학생들의 부담을 덜어주시려고, 또 그래야 스스럼없이 자리를 함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선생님의 사려 깊은 마음에서였다. 검소한 면에도 선생님을 따라갈 사람이 있을까. 교수로 재직하고 계실 때 교통수단으로 전차를 이용하신 것으로도 유명하다.
몇 년 전에 정년 퇴임하셔서 요즈음은 집필에만 전념하고 계신다. 내가 예전에 어느 지면을 통하여 만났던 선생님의 여행기 중에서 인도차이나와 네팔에 대한 기행문이 인상에 남는다. 고희를 넘기셨는데도 왕성한 의욕으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고 하시는 말씀에 아직도 꿈이 실려 있었다.
선생님의 수필집 “갑사로 가는 길”을 애독하며 많은 감회가 서렸다. <김필례 교장> 편은 이상보 선생님께서 존경하는 스승일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교장 선생님이셨기에 더욱 감회가 서린다.
그날 선생님은 뒤늦게 문단에 입문한 제자에게 등단 격려의 휘호를 선물해 주셨다.
“삶을 수필처럼.”
화선지를 펼쳐 든 손이 파르르 떨렸다. 내 이름 석 자를 넣어 직접 써 주신 휘호. 나는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이처럼 감격스러운 선물을 받아본 적이 없다. 징검다리도 없이 펄쩍 뛰어넘은 세월 저쪽의 스승님과 지금 나와 마주하고 계신 문단의 원로 선생님의 사랑이 모래에 스미는 파도같이 가슴을 적신다. 많은 고사성어를 들려주시면서 제자들에게 자신을 닦고 바른길 가기를 원하셨던 선생님께서 이 휘호를 내리신 이유를 알 것 같다. 문학의 길을 걷는 제자에게 수필처럼 단아하고 향기로운 삶을 살라는 깊은 뜻이 배어 있으리라.
거실 정면에 걸어두고 아끼는 이 휘호는 나를 긴장하게 한다. 진실의 바탕 위에 마음을 맑히고 바른 삶을 살아갈 때, 서서히 우러난 차 맛같이 향기로운 글을 쓸 수 있으리라는 교훈을 받는다.
선생님께서 내리신 휘호를 바라보며 내 삶과 마음을 담은 수필이 격조 있는 글로써 공감하는 많은 가슴과 만났으면 하고 바라본다.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