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세자의 재혼
유숙자
찰스 왕세자의 재혼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서거로 하루 연기되었다. 전 세계가 교황의 선종을 애도하고 찰스 왕세자도 장례에 참석할 예정이어서 9일로 연기되었다. 영국 언론이나 국민의 냉담한 시선을 받으며 천신만고 끝에 이루어지는 재혼인데 교황 서거로 순조롭지 못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힘들게 맺어지는 인연이다. 찰스는 재혼 하루 전, 성 베드로 성당에서 치러지는 교황의 장례식에서 무엇을 생각할까. 비명에 죽어간 다이애나를 한 번쯤 떠올려 볼까.
영국 왕실은 지난달 찰스 왕세자가 결혼식을 간소하게 치르기 원해 여왕이 참석하지 않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왕세자가 남편이 살아있는 이혼녀와 재혼하는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여왕과 국민의 여론을 고려한 것 같다. 한 나라의 군주이자 성공회의 수장인 엘리자베스 여왕이 소도시 시청에서 열리는 왕세자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은 품위를 손상하는 일이다. 결혼식은 중계되지 않으나 윈저 궁의 성 조지 예배당에서 로언 윌리엄스 캔터베리 대주교의 집전으로 열리는 결혼 축하연은 TV로 생중계될 것이라고 한다. 이번 찰스 왕세자의 재혼 소식에 남다른 감회가 이는 것은 1981년 우리 가족이 런던에 거주하고 있었을 때 로열 웨딩이 치러져 현지에서 보았던 탓이다.
로열 웨딩이 있던 날, 영국 전체는 축제의 물결로 넘쳤다. 세계 각국에서 초대받은 수많은 하객과 세기의 결혼식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인파로 런던은 인산인해였다. 세인트 폴 성당과 버킹엄 궁 근처에는 노숙하며 좋은 자리를 지키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국영방송 BBC나 민영방송 LWT는 짤막하게 뉴스만 전할 뿐, 여덟 필의 말이 끄는 꽃마차 속에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왕세자빈의 결혼식 광경을, 버킹엄 궁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런던 전체가 떠나갈 듯 열광하는 시민의 모습을 종일토록 방영했다. 동네마다 길 한복판에 테이블들을 붙여 음식을 차려 놓고 둘러앉아 먹고 마시고 신나게 춤을 추며 찰스와 다이애나의 결혼을 축하했다. 결혼식 후, 어디를 가나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비의 사진이 들어 있는 기념품 일색이었다. 마치 전 국토가 그들의 모습으로 덮여 있는 것 같았다.
왕실 가족의 움직임은 거의 매일 자세하게 미디어로 전달되어 알게 모르게 국민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왕실은 갓 결혼한 다이애나비 소식이 주를 이루었고 온 국민은 다이애나비를 무척 사랑했다. 결혼 1년 만에 윌리엄 왕자가 태어나자 그 인기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왕실의 크고 작은 가십거리가 다이애나비 덕분에 가려질 정도였다. 다이애나가 절대적으로 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것은 지금은 비록 영락했으나 귀족 집안의 딸임에도 서민적인 수수한 모습과 사람의 마음을 끄는 수줍은 미소, 순결하게 보이는 그 무엇을 더한 탓이다.
동화 속의 왕자와 공주처럼 세계인들의 주목과 사랑을 받으며 치러진 결혼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 것은 결혼 1년 후부터였다. 그즈음 찰스와 카밀라의 비밀회동이 입소문으로 나돌았다. 국민은 왕실에서 흘러나오는 소식에 민감했고 앳된 다이애나의 얼굴에 그늘이 서리는 것을 가슴 아파했다. 동화 속의 주인공들인 그들의 행복한 삶을 통해서 대리만족을 느끼던 사람들에게 받아들일 수 없는 배신이었다.
다이애나를 사랑했던 만큼 찰스는 증오의 대상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들의 결혼이 처음부터 애정 없는 결혼이었는지 또는 누구의 과실이 더 컸든지 간에 더는 결혼 생활을 유지할 수 없는 지경까지 도달한 모든 책임을 찰스에게 돌렸다. 결국, 다이애나는 결혼 15년 만인 1996년에 이혼했고 이듬해 36세의 아까운 나이에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숨졌다.
다이애나가 죽은 뒤 몇 년 후, 찰스 왕세자가 커밀라 파커 볼스와 재혼한다는 뉴스가 전해지자 많은 사람이 왕세자를 비난했다. 찰스가 카밀라와의 재혼을 위해 초혼을 깼다는 극단적인 루머마져 돌았다. 찰스의 재혼은 윌리엄과 해리와 한 약속을 어기는 것이다. 찰스는 두 아들에게 내 평생에 결혼은 한 번뿐이라고 말했었다. 카밀라의 무엇이 찰스의 삶 깊숙이 들어와 왕실과 세상을 휘두르고 있는지는 두 사람만이 알 것이다.
한편 냉정히 생각해 보면 왕족도 평범한 사람과 같이 희로애락의 일상생활을 누릴 권리가 있다. 다만 공인이기에 책임 있는 행동이 따르는 것이다. 그저 한 개인의 사적인 생활 일부로 스쳐 지나갈 수 있는 모든 것들이 호기심의 대상이 되고 관심의 초점이 되는 피곤한 삶이 일반인과 다른 것이다.
역사적으로 “귀족은 더 많은 사회적 책임을 진다”면서 빈자나 병자를 위한 자선 사업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전시에는 앞장서서 최전선에 나가 목숨을 바치는 희생을 감수하여야 한다. 특권을 이용해서 국가적인 위험을 피하려는 생각조차 용납하지 않는 책임 있는 삶의 태도, 그러한 정신세계, 전통이 국민으로부터 왕족들이 존경받는 요인이다. 그렇다면 찰스 왕세자도 이미 충분한 대가를 치뤘다고 볼 수 있을까?
어쨌거나 카밀라는 30여 년의 오랜 기다림에 종지부를 찍고 콘웰 공작부인의 호칭을 받으며 왕실의 한 사람이 된다.
이제 켄싱턴궁에서 왕자들과 행복한 일상을 보여주던 다이애나의 환영은 현실에서 사라진다. 후세 역사가가 어떻게 말하든 영국 국민의 뇌리에서 다이애나는 여전히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비운의 왕세자빈으로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