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 손자 윌리엄 (1)

유숙자

근래 소식이 뜸하던 작은아들로부터 전화가 왔다안부가 궁금하여 여러 차례 전화했으나 연결되지 않더니 오랜만이다. 아들 내외는 직장에 휴직계를 내고 캔자스로 가서 산모 가족과 함께 지내다 왔다고 한다. 출산이 임박한 산모의 보호자 자격으로 산실에 들어가 탯줄을 자르고 아기를 품에 안았을 때 눈물이 나더라 했다. 팔딱팔딱 뛰는 어린 심장의 박동이 가슴으로 전해졌을 때 생명의 신비에 감동하여 감사 기도를 드렸단다. 아들 내외는 산모의 서운함을 덜어 주고 모유도 공급받으며 여유 있게 머물다 왔다고. 2주쯤 후에 아기의 사진을 보내왔다. 건강해 보이는 남자 아기, 흑인 특유의 넓적한 코가 잘생긴 귀여운 아기다.

 

몇 년 전 아들이 양자를 들이고 싶다는 말을 언뜻 내비친 적이 있다. 그 후 잊고 지낼만하면 드리없이 불쑥불쑥 이야기를 꺼내더니 지난해 성탄절 가족 모임 때 곧 아기를 데려올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911테러 이후 외국에서 들어오는 아기를 잠정적으로 금하고, 백인은 입양아가 거의 없어 아무래도 아기를 많이 낳는 흑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나는 흑인이라는 말에 놀라 '뭐 흑인?' 하고 반문했다. 아들 내외는 인종에 대한 편견이 있느냐는 듯 눈을 커다랗게 뜨고 쳐다본다. 편견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의식 속에 동양 아이일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침착한 아들 내외가 몇 년을 두고 심사숙고하여 결정한 일일 텐데 지금 내 말이 무슨 효력이 있을 것인가. 그저 마음이 착잡할 뿐이었다.

 

미국에서는 사생활에 대해 일절 묻지 않는 것이 상식이지만 며느리는 백인이고 아들은 동양인인데 아기가 흑인이라면,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혼란스러워진다. 아들 내외는 선뜻 환영의 의사를 표하지 않는 부모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는다. 가난하고 기를 능력이 없어 불쌍하게 자랄 아이, 데려와서 잘 키워주고 싶다는데 왜 부모의 표정이 저럴까? 아들 내외의 얼굴에 난감한 빛이 어린다.

아들 내외의 뜻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나 가장 자연스러운 가족 구성은 동양 아기이거나 백인 아기가 들어와야 할 것이다. 한 가족의 피부색이 제각기 다를 경우 주위에서 받는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혹시 아이가 자라면서 가족 구성 탓에 주변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도 없지 않다. 집안일을 하다가도 이유 없이 우울해질 때 그 근원을 찾아가면 거기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 입양문제다. 한국에 계신 시어른들을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 아직도 시댁에서는 봉 제사 받음이 조상에 대한 예의로 알고 계신 완고한 분들인데 핏줄이 다르고 피부색마저 다른 그 아이를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 같지 않아 걱정이다이제까지 아기 없이도 잘 살았는데-. 이런 생각도 들었지만 이미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많은 상담을 거쳐 준비하고 진행했기에 더는 아무 내색 하지 않았다.

아들 내외는 자신들이 입양하는 아기이니 모든 결정은 본인들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의논 없이 진행했다. 10살에 영국으로 가서 살면서 한국 사람을 접해 보지 못했고 미국에 와서도 부모 이외에는 한국 사람을 만날 기회와 환경이 되지 않았다. 가족 이외에 단 한 사람의 친족이 없다는 것, 서로 왕래하며 부딪치며 한국 생활 습관과 전통을 자연스럽게 익힐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 같다. 방학 때 잠시 집에 오는 것 말고는 학교 주변에서 생활했으니 개인주의가 팽배해 있는 전형적인 미국 청소년으로 성장했다. 전 학년 장학생으로 학업에 충실했고 지금은 샌타바바라 대학에 근무하고 있다. 사리가 분명한 아들이기에 외관적으로 참견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그저 가슴만 끓이고 있을 뿐.

 

입양을 생각한 결정적인 원인은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의 마음에서 일게다. 아들 내외는 같은 대학 출신이다. 샌타바바라에서 오랜 교분을 유지했으니 며느리의 특이한 체질을 전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며느리는 꽃가루와 음식 알레르기가 심하다. 불어를 전공한 며느리는 졸업 후 파리에서 근무하고 있었으나 건강이 나빠져 2년여쯤 후에 미국으로 돌아왔고 곧 결혼했다. 알레르기 처방 약을 계속 먹어야 하기에 아기 갖기가 어렵다. 음식도 가리는 것이 많아 몸이 약하기에 그 건강 상태로는 출산에 무리가 따를 것이다.

그런 전후 사정을 전혀 몰랐던 나는 결혼한 지 5년이 지나도 아기가 없자 넌지시 아들에게 물어보았다. 더구나 며느리가 아들보다 3년 연상이고 초산이 늦어지면 힘들 것 같아 배려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속내를 떠봤다. 그때 아들은 분명한 어조로 그런 물음은 실례라 하여 입을 다물게 했다. 부모가 자식의 2세를 기다리며 묻는 것이 실례라 하니 교양있는 어머니로 남으려고 다시는 아기에 대한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즈음 미국 대기업의 부사장 부인인 조안 여사의 인터뷰를 보았다. 자신의 자녀가 있음에도 지체부자유 어린이 6명을 입양했는데 그중 3명이 한국 아이라 한다. 남편이 회사 중역이어서 가정 경제를 감당할 수 있어 다행이라 했다. 8자녀를 보살핌이 쉽지 않은 일인데 그들 덕분에 기쁘고 보람있게 살 수 있어 행복하단다. 조안 여사의 인터뷰는 내 안에 일고 있던 갈등을 단번에 날려 보낼 수 있을 정도로 깊은 감동을 주었다. 내 생각이 너무 편협했던 것 같아 부끄러웠다.

 

아들네가 양자를 들이는데 5년여 세월이 흐른 것은 까다로운 조건 때문이다. 반드시 아기의 양부모가 있어야 하고, 출산 시 아들이 탯줄을 끊기 원해 그런 조건이 쉽지 않았다. 몇 년 동안 아기를 찾느라 경비도 만만치 않게 들었고 입양기관에서 애쓴 보람이 있어 마침내 아들네 조건에 맞는 아기를 찾아주었다. 결혼한 지 5년이 지나면서부터 양자를 생각하던 아들 내외는 세월을 기다리며 찾은 끝에 결혼 10주년 선물로 아들을 얻었다.

William Tedros Yu. 내 손자 이름이다. 윌리엄의 법적 책임은 부모와 같이 큰아들도 져야 했다. 그럴 리야 없겠으나 만약에 작은아들 내외에게 사고가 생겨 양육할 수 없을 때 큰아들 내외가 Legal Guardian이 되어 아기를 책임진다는 쉽지 않은 법적 사인을 했다. 캔자스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어느 가정의 일곱째 아기가 작은아들네 장남으로 이런 과정을 거쳐 입양되었다. 아직 아기를 보지 못했으나 추수감사절 즈음에는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입양 문제를 꺼냈을 때 기쁘게 받아들여 칭찬해 주고 격려해 주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 우리나라가 핏줄을 얼마나 따지는 민족인가. 나 자신은 모르는 사이에 단일 민족이라는 뿌리 의식이 깊이 박혀 있었던 것 같다.

 

6.25 전쟁 이후, 우리나라는 전쟁고아가 많아 고아 수출국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말을 들었다. 수많은 고아가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으로 입양되었다. 그들이 먼 동양의 피부색도 다른 아기를 입양하여 자신들의 아기처럼 귀하게 키울 때 그들을 훌륭하게, 고맙게 생각했는데 막상 내게 닥치니 선뜻 'Yes'가 나오지 않았다.

잠시 하나님께서 맡기신 아기이기에 사랑해 주고 보살펴 주고 정성을 다해 키워서 어엿한 사회인으로 내보내고 싶다는 아들 내외의 생각이 더할 수 없이 기특하다. 나는 생각지도 못했던 인류애를 아들 내외가 실천하고 있으니 대견하다.

이제 나의 할 일은 기도하는 일, 윌리엄이 건강하고 바르게 잘 자랄 수 있도록 더욱 기도에 힘써야겠다. 사랑스러운 손자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아들이 입양을 생각했을 때의 소망대로 그 가정의 꿈나무로 튼실하게 자라 사회의 한 개체로서 성숙한 삶을 살 수 있게 되기 바랄 뿐이다.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