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송이 장미
유숙자
“이번 밸런타인스 데이는 토요일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왜 아니겠어, 최소한 와이프한테 긁힐 염려가 없으니 천만다행이지.”
며칠 전, 친구들과 담소하던 어느 찻집에서 청년 둘이 앉아 나누는 대화를 흥미 있게 들었다. 홀 안이 비교적 한산한 편이어서 그들의 이야기가 잘 들렸다. 지난해 아들도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 나는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회사 여직원들이 밸런타인스 데이에 근무처로 배달되어 오는 꽃에 무척 예민해 있다고. 마치 남편이나 연인의 사랑의 척도가 꽃다발 크기에 따라 정해지는 것 같이 생각한단다.
내일은 밸런타인스 데이다. 일 년 중 가장 많은 사랑의 표현이 오가는 시기가 이때가 아닌가 싶다. 초콜릿 상점 앞에 길게 줄이 이어지고 꽃가게가 문전성시를 이룬다. 유래야 어떻든지 해가 갈수록 과열된 분위기여서 나이와 관계없이 여인이면 꽃이나 초콜릿을 받고 싶어 한다. 밸런타인스 데이 증후군은 부부나 연인들이 사랑과 기쁨을 나누는 날임에도 심심찮게 사랑 확인의 언쟁으로 번지는 웃지 못할 일도 생긴다.
어느 해였나, 지금은 만혼을 즐기고 있는 나의 절친한 친구가 밸런타인스 데이가 저무는 늦은 저녁 장미 다발을 안고 들어섰다. 장미를 받았는데 집으로 가져가고 싶지 않아 꽃 좋아하는 사람을 찾아왔다고 했다. 나는 꽃을 받으며 의아한 눈으로 친구를 살폈다.
밸런타인스 데이 오전에 여자 직원만 8명이 있는 친구의 사무실에 경쟁이라도 하려는 듯 크고 작은 장미꽃 다발이 속속 배달되었다. 한낮이 기운 오후까지 꽃을 받지 못한 사람은 독신인 친구와 한 여직원뿐이었다. 그것은 당연했다. 그 두 사람에게는 꽃을 보내올 사람이 없었다. 다른 직원들은 행복한 표정으로, 상기된 기분으로 퇴근 준비를 서둘렀다. 그때 결혼한 지 몇 달 되지 않는 나이 어린 직원이 남편으로부터 받은 커다란 꽃다발을 삼등분하여 빈손인 두 직원의 팔에 안겨 주었다.
아직은 풋풋한 신혼이고 결혼 후 첫 번 맞는 밸런타인스 데이라 의미가 다를 것인데 남편이 보낸 사랑을 나누었다. 꽃을 건네는 모습이 참으로 신선하게 보였는데 정작 꽃을 받아든 친구의 마음은 무겁고 시리더란다. 꽃 사이에서 삐죽이 얼굴을 내밀고 있는 메모지에는 “해피 밸런타인스 데이, 사랑해요.”라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생각지도 않았던 꽃을 받고 기뻐해야 하건만 눈물이 나오도록 슬펐다는 친구의 말에 외로움이 절절히 배어 있었다.
살아가노라면 알게 모르게 타인으로부터 배려를 받을 때가 있다. 자상하게 마음 써주고 보살펴 주는 사람이 어찌 고맙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외로울 때 다가와 위로가 되어 주는 사람. 그런 마음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슴이 따뜻한 사람,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에게서만 나오는 사랑의 향기일 것이다.
나도 가슴 저린 한 송이의 장미를 받았던 시절이 있다.
무역회사를 경영하는 남편이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주었다. 그 사람은 믿음직스럽고 착실한 사람이라고 남편이 늘 칭찬했다. 칭찬 끝에 불이 붙었는지 막상 돈을 받고는 작정한 두 달이 지나도록 아무 연락 없더니 종무 소식이었다. 큰 액수의 돈이 빠져나가자 남편의 사업이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꼼꼼하여 빈틈없이 일을 처리하는 남편은 모든 계획에 차질이 생겨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몹시 타격을 받았다. 신용이 생명이라는 좌우명을 가지고 일구어 번창 일로를 걷던 사업에 붉은 불이 켜졌다.
그해 밸런타인스 데이에 밤늦게 들어온 남편이 내게 장미 한 송이를 건네주었다. 온종일 생각에 몰두하다 보니 시간의 여유가 없었고 수중에 가진 돈도 넉넉지 않아 아예 한 송이만 준비했다고 한다. 그때 남편은 꽃 같은 것을 생각할 여력이 없던 때였다. 꽃을 받고 고마워 남편을 안아주려 다가서는데 내 앞에 검불같이 바싹 마른 타인이 서 있었다. 매일 함께 지내면서도 의식하지 못했다. 피곤에 지쳐 곧 쓰러질 것처럼 보이는 한 남자. 그런 남편의 모습을 보며 얼마나 눈물이 나던지. 그때 나에게 장미 한 송이는 이 세상 장미를 다 담은 하나 가득함, 유일함으로 마음 밭에 깊게 심어졌다. 남편이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건네준 마음이기에 밸런타인스 데이를 맞을 때마다 가슴 저린 고마운 기억으로 되살아난다.
우리가 숨을 쉬어야 살아가듯, 사랑해야 살아갈 힘이 생긴다. 사랑은 번민과 고뇌를 해결해 주고 기쁨과 평안을 가져다준다. 사랑은 담기는 그릇에 따라 빛깔과 향기가 다르지만, 그 자체만은 세월이 바뀌어도 불변한다. 살아갈수록 우리 가슴이 삭막해져서 눈에 나타나 보이는 것에 사랑의 초점을 맞추기 쉽다. 더욱이 순수한 사랑, 순수한 인간성이 날로 제빛을 잃어 가고 있어 이 세대는 물질을 얻고 철학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늘고 있어 걱정스럽다.
밸런타인스 데이가 되면 회심의 미소를 짓게 된다. 사랑할 사람도 사랑받을 사람도 없어 이름 있는 날이 제일 싫다던 친구도 이제는 만혼의 행복을 만끽하고 있다. 친구도 이맘때가 되면 외로운 누군가에게 장미의 사랑을 열심히 나르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