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이여, 노래여
유숙자
외국 생활 30여 년이 넘었어도 겨울에 서울 방문은 처음이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기에는 가을이 좋아 모국 방문은 주로 단풍의 계절에 이뤄졌다. 6년 만에 본 서울은 세련미가 물씬 풍기는 도시의 면모를 더했다. 접하게 되는 공간마다 멋지고 편리하고 고급스러웠다. 무엇보다도 나를 설레게 한 것은 지하철 역사에 흐르는 시였다. 탑승객의 안전을 위해 승강장에 만들어 놓은 유리문에 시가 적혀 있었다. 눈 닿는 곳마다 시였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풍성했다. 시를 감상하며 그 여운을 즐길 수 있는 여유로움이 좋았다.
이번 서울행은 한국 수필가협회에서 수여하는 해외수필문학상을 받기 위함이다. 눈의 계절에 갈 수 있어 좋았고 그리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 설렜다. 무엇보다도 문학상 수상자로 참석할 수 있기에 행복했다. 해마다 먼 곳까지 초청장을 보내 주시는 Y 선생님의 구름카페문학상 행사장도 참석했다. 연말이기에 행사가 풍성했고 참여할 기회가 많아 겨울 방문의 보람을 안기었다.
한 해의 끝자락이라 모두 바쁘게 돌아가고 두고 온 미국도 집안 행사에 문학 행사가 많아 생각처럼 푹 쉴 수 없었다. 한가지 바람은 떠나기 전에 꼭 눈을 보고 싶었다. 눈 내리는 서울 거리를 걷고 싶었다. 눈이 내리지 않는 고장에서 사는 나는 겨울이면 알 수 없는 갈증에 시달렸다. 눈이었다. 푸근히 내려주는 눈을 볼 수 없는 겨울은 꽃이 피어 있어도 삭막했다. 물론 여행을 하면 볼 수 있으나 아침 창문을 열었을 때 밤새 사락사락 내려 소복이 쌓여 있는 눈이 보고 싶었다.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꽃잎이 춤추듯 나풀거리며 내리는 눈을 맞을 수 있다면 더없는 기쁨이겠으나 떠날 날이 임박해도 눈 올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눈을 보지 못하고 떠난다면 무척 서울 할 것 같아 주변 사람에게 ‘서울엔 눈도 안 오나?’ 하며 곧잘 눈 타령을 했다. 어린아이처럼.
젊은 시절, 눈이 내리든 날 곧잘 찾았든 비원과 삼청동을 가보고 싶었다. 원 없이 걸어보리라. 차로만 움직여야 하는 답답함에서 벗어나 정처 없이 무작정 걷고 또 걸으리라. 가까운 교외로 나가 시골의 논두렁 밭두렁도 밟아 보고 싶었다.
서강 팔경에 사는 친구 조 시인을 만나러 가는 날은 칼바람이 매서웠다. 30여 년 이상 각별하게 지내는 친구, 생일이 같다는 인연 이전에 동양화를 배우면서 아이들 학부형으로 가까워졌다. 조 시인은 섬세한 감성과 그만의 독특한 분위기가 있어 시를 쓰지 않았다 해도 시인의 향기가 물씬 풍겼을 친구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시다.
강변 연가 아파트는 강물 위에 떠 있는 배 같았다. 철새의 도요지 밤섬이 바로 눈앞에 운치 있게 펼쳐져 있고 여의도가 한눈에 들어와 가히 서강 팔경이라는 이름에 손색이 없었다. 이처럼 아름다운 곳에서 친구는 ‘시’처럼 살고 있었다.
친구는 긴 세월 동안 그리움을 담아 보낸 카드로 앨범을 만들어 놓았다. 펼쳐 보이는 한장 한장마다 새삼 감회가 어린다. 친구는 이처럼 감동을 주는 멋있는 여인이다.
어느 해였나. 서울 방문을 알리자 화분에 상추씨를 뿌렸다. 몇 개의 화분에다 심어 놓은 여린 상춧잎을 따서 쌈을 싸 입에 넣어 주던 친구. 그날 나는 쌈이 아니라 친구의 사랑을 받으며 가슴이 먹먹했다.
3주간의 고국 방문은 친구와 만남을 끝으로 아쉬움을 남겼다. 근래에는 ‘고도원의 아침 편지’에서 소개된 ‘부엉이 할머니’로 더욱 유명해진 조 시인. 헤어짐이 섭섭하여 살포시 안은 채 오래오래 서로 등만 도닥였다.
서울을 떠난 후 친구는 자신의 부엉이 방에 정감 어린 감상을 담아 놓았다.
"친구가 머물렀던 모국에서의 일정을 관광 열차로 생각하면 여행 끝자락 쯤에는 한강과 여의도가 바라보이는 우리 집이 있었고 그다음 날에는 이번에 꼭 만나고 싶다던 흰 눈이, 따스한 느낌의 솔방울만 한 함박눈이 마른 잎이나 흙먼지의 안부를 물으며 친구의 희망에 소복하게 내렸습니다. 잘 보시고 출국하셨으리라 믿어요.
올 한해가 뉘엿뉘엿 저무는 중에 절정을 이룬 친구가 향연을 펼쳤습니다. 친구는 한국 수필가협회가 주최하는 '해외 한국수필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내 마음에 느껴지는 빛나는 모습 그 월계관을 우러르고 존중으로 축하합니다
우리 삶에서 여러 모습의 발자취를 볼 수 있겠으나 남다른 친구의 생활을 읽고 있으면 길고 긴 피륙에 감긴 비단의 무늬처럼 짜임처럼 아름다움이 돋보여 절로 신비감이 듭니다. 어떤 힘이 친구의 마음을 움직여 이처럼 또렷이 무늬를 이루었을까요? 비결이 무엇인가요 끝없는 노력에 감동하고 감탄합니다
겨울비가 아침을 열고 있습니다. 깃털 같은 눈이 남아있는 산에도 작은 호수의 목마름에도 구슬 비는 꿈 꾸듯이 내립니다. 내 영혼에 담는 이야기들로 하여 먼 훗날 추억 끝에 태어나는 연가로 하여 거듭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그리움이여! 노래여!"
짧은 만남의 긴 여운. 서로의 가슴에 시들 줄 모르는 꽃 한 송이 피워 놓고,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그리움의 샘 하나 파놓는다. 다시 기다림의 시작이다.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