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유숙자
피아노 건반 위에서는 두 마리 백조가 춤을 춘다. 드뷔시의 “달빛(Clair de Lune)”. 피아노 소리가 물결처럼 퍼지는데도 정적이라는 표현이 가당했다. 그것이 내가 처음 백건우 피아노 독주회에서 받은 감상이다. 그의 연주는 인간의 영혼을 움직이는 고요와 안정이 자리한다. 청중들은 음악 속에서 하나가 된다. 그와 함께하는 시간은 시종 예술적 환희와 깊이에 젖어들게 한다. 백조는 파도 위를 넘나들며 그 흐름에 몸을 맡긴다. 건반 위에서 그도 백조의 움직임을 따라 함께 춤추고 있다.
1970년 후반에 가졌던 독주회 때 백건우 씨는 자신의 연주에 흡족하지 못했다. 그 후 처음 갖는 독주회였기에 다음 날 평론이 나올 때까지는 불안한 마음을 누를 수 없었다. 이번 연주회는 리스트 작품이었다. 그는 어느 작품이든 전곡을 집중적으로 탐구하여 연주한다. 백건우의 음악적 연출은 생동하고 생명력이 넘친다. 인간의 영혼을 움직이는 고요와 안정이 깃들어 있다. 청중들의 내면에 잠들고 있는 음악에 대한 요구를 눈뜨게 해 준다.
연주가 끝나고 열광하는 관중의 박수가 멀어지자 그는 어느 카페를 찾았다. 마실 줄 모르는 와인 한 잔을 앞에 놓고 깊은 생각 속에 빠져 있었다. 당시 한 신문사 기자가 그의 뒤를 밟았다. 백건우가 찾은 카페에 들어가 옆자리에 앉았다.
“얼마나 시원하십니까. 연주회가 끝나서” 하고 기자가 물었다.
“시원하다니요. 고민은 이제부터 입니다.” 그날, 밤이 늦도록 백건우와 기자는 오래된 친구처럼 속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연주 활동만 하시는데 경제적으로 안정되셨습니까?” 그때 백건우는 허탈하게 웃었다.
“예술가는 돈과는 무관합니다. 돈을 생각한다면 이미 예술가가 아니지요. 저의 집은 목조 이 층 건물입니다. 층계를 오르내릴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납니다. 제 방 침대에 누워 있으면 창가에 와 닿는 나뭇가지와 잎들의 살랑이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 사이로 달이 떠오르지요. 이러한 경관 속에 사는 내가 돈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죄를 짓는 것일 겁니다.”
기자는 말을 아끼는 그와 밤이 이슥하도록 앉아 있다가 카페를 나왔다. 그날 밤 기자도 잠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내일 아침 신문에서 백건우 예술에 대한 찬사가 온 지면을 덮게 되기를 바라며 또 다른 술잔을 기울였다. 백건우 그는 참으로 영혼이 순수하고 인간미 넘치는 참 예술인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희열에 벅찬 마음의 응원을 보탰으리라.
다음날 기자의 예견대로 파리의 모든 일간지는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로 백건우를 지목하는데 인색지 않았다. 그의 연주는 완전한 성공을 거둔 것이다. 음악 평론가들이 그를 가리켜 “건반의 순례자” 혹은 “고전적 기교와 낭만적 서정성이 조화된 피아노의 시인”이라고 하던 말이 새삼 가슴에 와 닿는 순간이었다.
백건우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의 연주 “달빛”에 깊이 빠져들었다.
“달빛”은 드뷔시의 초기 작품인 베르가마스크 조곡 중에 세 번째 곡이다. 베르가마스크 는 북이탈리아 베르가모 지방의 무곡이란 의미를 지닌다. 이 곡은 네 곡으로 되어 있는 모음곡으로 다른 세곡이 무곡으로 되어 있는 것과 달리 “달빛”은 조용하고 느린 안단테의 곡이다. 기존의 낭만주의 음악의 화성법에 대해 반기를 들며 새로운 예술에의 열정을 불태웠을 무렵에 작곡한 곡으로 베르가모 지방 농민생활에 대한 인상을 바탕으로 했다.
“달빛”은 고전 시대의 모음곡 제목을 빌리지 않고 표제적 제목을 붙였다. 달빛이 비치는 밤의 풍경을 단아한 악상과 인상주의적인 화음으로 표현하려고 하고 있는데 이것이 당시 유행하던 문학과 미술에 영향을 받았음을 짐작게 한다. 관현악과 하프의 절묘한 조화와 다양한 음색이 어울려 아름다움을 주고 있는 관현악 편곡도 피아노 못지않게 아름답다.
“달빛”은 차가운 것 같으면서도 감미로운 멜로디로 자연의 아름다운 달빛을 암시하는 서정이 넘치는 피아노의 명곡이다. 그 곡을 듣고 있으면 무엇엔가 이끌리어 달빛 고요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신비가 있다. 달빛은 우리에게 뽀얀 그리움의 결 고운 미소를 선사한다. 은 비늘이 잔잔한 차가운 밤바다 위에 드리운 진줏빛 꿈이 서린다. 꽃잎이 지는 밤에 외로움을 나눌 수 있는 그대가 된다.
밤이 이슥하여 이 층 내 방을 들어서면 달빛으로 흥건히 적시어져 하얗게 깔린 그리움을 본다. 차마 그 빛 속으로 성큼 발을 내밀 수 없기에 창가에 앉아 물끄러미 달을 바라본다. 달은 아무리 정복하려 해도 정복당하지 않을 것 같은 신비스런 자태로 중천에 높이 떠서 세상을 내려다본다. 매그놀리아 잎에도 달빛은 조요히 내리고 내 마음의 창에도 무한한 정감을 일으키며 쌓인다. 달무리가 풀리는 듯, 빛의 향기가 퍼지이듯, 달빛이 은총으로 온 누리에 부어지고 있다.
이런 밤이면 자연인이 되어 자연과 벗하며 사는 피아노의 시인이 그리워진다. 달빛이 방안 가득 물결처럼 출렁이는 밤, 피아니시모로 연주되는 “달빛”을 듣는다. 나뭇가지 사이에서 건반의 순례자가 환하게 얼굴을 내밀고 있다.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