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두고 떠난 아이

                                                                                                                                                          유숙자

세계적 바이올리니스트 김영욱 씨가 40년 만에 영구귀국해서 대학 강단에 섰다. 금의환향한 셈이다. 16세의 어린 나이에, 유진 올만디가 지휘하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통하여 세계무대에 데뷔했고 명 지휘자들이 이끄는 오케스트라를 두루 거치며 명성을 날렸다.

그가 전 세계를 무대로, 정상급 바이올리니스트의 대접을 받으며 활동하던 연주생활을 접고 정든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앞으로 후진 양성과 음악 연구에 더 많은 시간과 힘을 쏟는다니 예술가로서의 진가가 돋보인다.

신문을 장식했던 어린 시절의 모습이 인상에 남는다. 바이올린을 들고 미소 지으며 서 있던 미소년. 그가 청장년을 지나며 한결같이 꾸준히 연주활동을 하더니 이제 강산이 몇 굽이를 돌았건만 여전히 단아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세월이 흘렀어도 그의 예술세계는 변치 않은 젊음을 그에게 부여한 것 같다.

 

지금이야 경제적 여유만 주어지면 나름대로 유학할 수 있겠으나 1950, 60년대에는 실력이 있어도 외국에 나가 공부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때였다. 국가 경제가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유학을 간다는 것이 여간 일이 아니었다. 외국으로 가는 자체만으로도 무한한 동경과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 출세를 보장받는 것처럼 생각 되었다. 특히 예능계 학생이 유학을 떠날 경우, 신문에 대서특필했기에 나와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일지라도 관심 있게 보였었다. 김영욱 씨의 근황을 접하면서 어린 나이에 화려하게 출발했으나 근래까지도 소식이 오리무중인 한 소년이 떠오른다.

 

초등학교 5학년 시절, 나에게 꿈을 심어준 친구가 있었다. 그 아이는 바이올린을 공부하는 희춘이라는 아이이다. 어른 같이 하이칼라 머리를 양옆으로 가른 것이 큰 키에 잘 어울렸고 계집아이같이 얼굴이 희고 곱상했다. 당시, 어느 대학교수에게 바이올린을 배우고 있었는데 나와는 같은 학급이었다.

우리 반 아이들은 가끔 운동장처럼 넓은 희춘이네 집 뒷마당에서 숙제도 하고 놀기도 했다. 아이들이 유독 그 집을 좋아하는 이유는 희춘이 어머니가 찐 고구마나 옥수수 같은 간식을 한 쟁반씩 내어다 주셨기 때문이다. 식량이 부족하여 잡곡밥도 먹기 어려운 가난한 시절이었기에 그 간식이 우리에게는 꿀맛이었다.

 

어느 날 희춘이는 장래의 희망이 무엇이냐고 나에게 물었다. 자신은 외국에 가서 바이올린을 공부할 계획이라고 했다. 바이올린 연주자가 되어 카네기 홀에서 연주하게 되는 것이 꿈이라고 한다. 그것은 본인의 의사라기보다 부모님의 바람이었던 것 같다. 나는 그때 카네기 홀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는데 유명한 예술가만이 설 수 있는 무대라고 하기에 나도 외국에 가서 공부할 것이라고 엉뚱한 말을 했다. 희춘이는 아무 말 없이 세끼 손가락을 내밀었다. 무엇을 약속하자는 것인지도 모르는 채 손가락을 걸었다.

 

6.25 전쟁을 치른 지 일 년 뒤 가을, 희춘이는 졸업을 몇 달 앞두고 스웨덴으로 떠났다. 그 아이는 고별 공연으로 슈만의 꿈(트로이메라이)을 연주했다. 전교생이 모인 강당에서 교장 선생님은 희춘이가 유명한 음악가가 되어 돌아올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모두 부러워 손뼉을 쳤다.

 

피아노라고는 교장실에 한 대밖에 없었던 시절, 그때까지 내가 익히 보아온 것은 오르간이었다. 바이올린을 실제로 본 것이 희춘이에게서 처음이었다. 그가 가끔, 음악 선생님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바이올린을 연주할 때면 우리는 황홀한 눈빛을 그에게 보냈다. 그는 학생들의 선망 대상이었다. 많은 친구가 고별 공연 때 눈물을 흘린 것도 우리들의 위대한 음악가가 떠나는 부러움과 서운함 탓이었다전쟁의 상처가 가시지 않아 거의 빈곤과 열악한 환경이었다.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아이들이 많고 의식주조차 제대로 해결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때 바이올린을 공부하러 외국으로 간다는 말은 도달할 수 없는 별세계의 이야기처럼 들렸다. 그로 인해 나도 소망의 별 하나 가슴에 묻고 살게 되었다.

 

희춘이가 떠난 후, 아이들은 행여 그에게서 어떤 소식이라도 오지 않으려나 목 빠지게 기다렸다. 모두 외국 우표가 붙여진 멋진 그림의 카드가 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3월이 되어 우리가 졸업할 때까지 그에게서는 아무런 소식도 오지 않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대부분 거주지가 인접해 있어 오가며 친구들을 자연스럽게 만났다. 그때마다 소식 없는 희춘이를 궁금해했다.

 

내가 성인이 되어 사회 활동을 할 때쯤, 그도 어디선가 연주 활동을 하고 있을 것 같았다.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나서 12살에 가졌던 꿈을 실현해 세상을 놀라게 할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문 문화면에 한국을 빛낸 음악인들이 보도될 때, 세계 각국에서 연주하는 음악인들의 스케줄이 활자화될 때마다 유심히 살펴보았다.

 

내 거주지가 유럽으로 옮겨지면서 많은 연주회에 참석했다. 한국을 빛낸 연주자로 백건우를 비롯해서 정경화, 강동석 16세의 어린 피아니스트 서주희까지 좋은 콘서트를 관람했으나 아무 데서도 그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다.

예술계가 황무지 같던 시절, 일찍이 남다른 포부와 희망으로 더 큰 세상에서 공부하려고 떠난 희춘이는 지금 어디서 무엇이 되어 있는 것일까. 설혹 음악가가 되지 않았다손 치더라도 소식이나 알고 싶다던 어릴 적 친구들도 이제는 거의 소식을 알 수 없고 귀밑머리에 서리가 내려앉을 만큼 세월이 흘렀다.

 

트로메라이를 듣게 될 때면 고별 연주를 마치고 새로운 세계를 찾아 떠난 어린 예술가의 모습이 떠오른다. 손가락을 걸면서 뭔가를 약속한 친구, 얼굴이 희고 곱상한 희춘이가 생각난다. 꿈이 그려지기 시작하던 시절 바이올린과 함께 눈부시게 아름다운 빛깔로 나에게 다가왔던 친구이기에 이따금 세월 저편의 기억 속에서 서성이고 있다.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