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고향
유숙자
자신이 태어나 성장한 곳을 고향이라고 한다. 태어나지 않았다 해도 살아가며 잊히지 않는 곳을 고향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고향은 어머니 품속처럼 포근하고 황금 물결을 이루는 황혼의 들녘같이 정겹다. 살다가 힘들고 지칠 때면 고향을 찾고 싶다. 물씬 풍겨오는 흙냄새가 향긋하고 공기마저 다디단 고향. 인정과 그리움이 있기에 우리 본성이 태어난 곳으로 향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고향 하면 일반적으로 농촌을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집 뒤에는 야트막한 동산이 있고 밤이면 산 위로 달이 떠오르고, 초가집 지붕의 박꽃이 달을 향해 그리운 가슴 살포시 열어 보이는 곳. 집 앞 가까운 곳에 맑은 시내가 흐른다면 더없이 좋겠고 푸른 들판에서 어린 송아지가 음 메-하고 어미 그리워 우는 그런 관념적 정경을 생각한다. 도시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고향이 없다는 말을 곧잘 하는 것도 그 같은 이미지에서 기인한 것 같다.
내가 태어난 곳은 서울이지만 마음의 고향은 개성이다. 어려서부터 6.25 전쟁이 나기 전까지 방학 때면 으레 할아버지 댁에서 한 달간 머물다 왔다. 그래서인지 내 유년 시절을 추억하면 고장 난 시곗바늘처럼 늘 개성 친가에 고정되어 있다. 송악산 기슭의 평화로운 마을, 집 뒤란에서는 앵두가 빨갛게 익어가고 연꽃이 눈을 뜨는 연당 옆으로 삼 포 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던 보랏빛 꽃 동네, 송 씨가 많다고 하여 이름 지어진 송촌 마을이다.
첫아이가 태어나고 6개월 후에 화곡동으로 이사했다. 그때 화곡동은 겨울잠에서 막 깨어난 계절과 맞물려 신도시가 한창 이루어지고 있었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자연 속에 전원도시를 이룩해 놓았다. 빨강 파랑 지붕을 머리에 이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400여 채의 집들이 마치 동화 속 이야기 같았다. 신문은 이곳을 멋지게 광고하여 내 흥미를 끌었다.
'전설적인 전원의 도시 화곡동.' 로맨틱한 슬로건을 내세운 국민주택의 선전 광고이다.
10여만 평의 대지에 핵가족이 살기에 알맞게 현대식으로 주택을 지어 놓았으니 복잡한 도시를 떠나 이곳 전원주택으로 오라는 슬로건이다. 집을 사려는 계획이 전혀 없던 때였으나 이색적인 타이틀에 매료되어 상상의 날개를 타고 전설 속을 오르내렸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대로 드디어 제비가 박 씨를 물어다 주었다. 시숙께서 주택을 분양받아 우리에게 주셨는데 예의 그 전원주택이었다.
이사 온 집 주위는 별천지였다. 뒤쪽에 등산하기 알맞은 낮은 산이 있고, 산 밑으로 작은 개울이 흘러서 아이들이 물장난치며 놀기에 마침이었다. 인근 산에서 들려오는 뻐꾸기의 청아한 노랫소리가 신선하고 개나리로 울타리 처진 딸기 농장에서 하루가 다르게 익어 가는 딸기가 바람 불 때마다 달콤한 향기를 실어다 주었다. 무엇보다 아이와 함께 딸기를 직접 따서 사 오는 것이 재밌었다.
불편한 점도 있었다. 교통수단과 도로가 포장이 안 되었다. 신도시라 잘 알려지지 않아 화곡동을 모르는 사람이 많고, 시내에 나갔다 들어올 때 택시를 잡으면 거절하기 일쑤였다. 웃돈을 얹어 주어도 빈 차로 나온다며 달가워하지 않았다. 초창기에는 버스도 하루에 몇 차례만 드나들었다. 논을 메워 세운 도시라 비가 오면 아스팔트가 깔린 큰길가를 제외하고는 발이 푹푹 빠졌다. 오죽했으면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살겠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왔을까마는 불편함은 동적일 때뿐이고 자연 속에서 사는 정신적 풍요가 삶의 생기를 더했다.
새집으로 이사 오고 몇 달 후, 첫아이 생일을 맞았다. 나무 한 그루 없는 텅 빈 마당이라 첫 돌 기념으로 흑장미 묘목을 심었다.
첫돌 기념 식수 '장미 1호'가 탄생하였다.
그때부터 아이들의 입학이나 가족의 생일, 집안의 경사 등 축하할 일이 있을 때마다 나무를 심어 해를 거듭할수록 정원에는 나무가 무성했다. 대문에 아치를 이루고 기어오르는 노란 줄 장미가 탐스럽고 그 아래 사열하듯 줄지어 선 빨간 미니장미가 앙증스럽다. 채송화로 울타리 친 꽃밭에 활년, 봉숭아, 분꽃, 베고니아가 곱고 목련, 라일락, 흰 철쭉, 향나무, 진달래가 있어 우리 집 정원은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다웠다.
첫 번 피는 장미는 크기가 어른 주먹만 하다. 꽃대를 쭉 올리며 겹겹이 포개진 꽃잎을 조금씩 열어 보일 때 그 아름다움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바람이 불지 않아도 은은히 스치는 향기가 온 집안에 스민다. 장미는 비를 만나면 맥을 못 춘다. 커다란 꽃잎 사이사이로 스며든 물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여 고개를 떨군다.
처음 몇 해는 비를 맞아 축 늘어져 있는 꽃을 보면서 속수무책으로 안타깝기만 했다. 피자마자 비가 온다든지 날씨가 조금만 꾸물거려도 걱정되었다. 고심 끝에 비가 밤중이나 갑작스럽게 내릴 때는 어쩔 수 없으나 예보가 있을 때는 미리 비닐봉지로 장미꽃을 싸서 묶어 놓는다. 그 일도 수월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 때는 비를 흠뻑 맞아가며 작업하다가 감기가 들었고 서둘다가 가시에 찔려 고생한 적도 있었다. 또 다 싸 놓고 나니 오후에 해가 쨍쨍해서 푸느라 애썼으나 효과를 본 때가 더 많았다. 나의 장미 싸기는 기쁨의 작업이었다. 아마 모르기는 해도 부모님께 이런 정성을 들였다면 효녀 상은 떼어 놓은 당상이었으리라.
가랑비가 내리던 어느 오후, 외출에서 돌아오는데 골목길까지 누나의 음성이 들렸다.
'감기들면 어찌하려고 그래, 어서 방으로 들어가자. 엄마 오시기 전에 옷 갈아입어야지.'
누나 이야기는 유치원에서 돌아온 큰아이가 옷도 갈아입지 않은 체 '누나, 비와.' 하며 우산을 꺼내서 장미꽃을 바쳐주고 있더란다. 온몸이 비에 젖어 덜덜 떨면서도.
아이는 나를 보자 울음보를 터뜨렸다. '엄마같이 할 수 없었단 말이야.
비가 올 때마다 곁에서 비닐과 끈을 집어주던 큰아이는 엄마가 하던 일이 생각나는데 혼자서 어쩔 수가 없으니 우산을 받쳐 들고 서 있었다. 그날 나는 장미 1호 앞에서 울고 있는 아들의 마음이 예뻐 한동안 말없이 꼭 끌어안아 주었다.
동네 화원 앞을 지날 때면 큰아이는 곧잘 이런 말을 한다.
'엄마, 꽃은 참 예뻐 그치.' 말간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며 대답을 기다린다.
'엄마는 우리 아들보다 더 예쁜 꽃을 보지 못했네.' 그럴 때면 잡은 손을 세차게 흔들며 씩씩하게 걷는다. 아들이 무척 귀엽다.
우리 집 마당의 나무들은 각각 주인이 다르다. 나무마다 고유의 번호와 이름표를 걸어 놓았다. 언제 어떤 일로 한 식수인지 간단하게 적어 놓았다. 식구들은 자신의 나무에 물을 주고 풀도 뽑아주며 정성을 기울였다. 그래서였을까. 정원에 서면 꽃들의 맑은 숨소리가 들리는 듯했고 향기로운 미소가 노래처럼 번졌다.
큰아이가 4학년이 되었을 때 우리는 지난 10여 년간 꿈을 키워온 화곡동 집에서 서교동으로 이사했다. 아이들이 고학년이 되면서 통학 시간을 줄이기 위해 학교 근처로 갔다.
'엄마, 꽃나무도 가져가나요?'
'아니, 우리가 이사 갈 집에도 나무가 많아 두고 가기로 했어.'
큰아이는 동네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도 싫었지만, 자신의 이름표가 달린 나무들을 두고 가는 것이 더 섭섭한 것 같았다. 그것은 나무마다 사연이 있고 그 나무와 함께 커왔기에 정이든 탓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이사 가기 전날, 큰아이는 자신의 나무에서 번호와 이름표를 떼어 보물 주머니에 넣었다. 뒷모습이 쓸쓸해 보였다.
새로 이사 간 집에는 마당 한쪽을 다 차지할 정도로 커다란 등나무가 있었다. 마침 우리가 이사할 때 등꽃이 활짝 피어 바람이 불 때마다 보랏빛 물결이 출렁거렸다. 정원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사과나무에는 아직 익지 않은 화초 사과가 한 꼭지에 5, 6개씩 열려있어 파란 등을 달아 놓은 것처럼 운치가 있다.
큰아이는 새집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커다란 방을 쓰기 편하게 꾸며 줬으나 좋아하는 기색이 없었다. 가끔 주말이면 외출했다가 돌아왔고 그런 때면 옛 동네에 가서 우리가 살았던 집도 보고 친구도 만나는 듯싶었다. 해가 바뀌고 늦추위가 심했던 어느 일요일, 종일 집을 비운 큰아이가 땅거미가 질 때쯤 들어왔다.
'엄마, 우리 집은 없어지고 커다란 이층집이 생겼어. 나무도 다 없어지고.'
신을 벗지도 못한 채 황급히 뛰어 들어온 큰아이 입에서 나온 말이다. 떠나온 곳의 변화된 모습에 자신의 추억이 없어진 것 같았을까. 이만큼 성장하기까지 함께했던 공간이 한순간에 사라져 허무와 충격이 컸던 것 같다. 아들은 실망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보다가 방으로 들어갔다.
아들은 우리가 두고 온 것에 아무런 권리가 없음을 안다. 다만 그곳에 두고 온 마음을 다스리기 어려웠던 것 같다. 방문을 노크했으나 반응이 없다. 저녁도 거른 채 그냥 잠이 들었는지 아침이 될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아들의 흐느낌을 꿈속에서 들은 것 같다. 그제야 비로소 이사 올 때 첫 돌 기념 장미 1호와 몇 그루의 장미를 챙겨오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엄마, 꽃나무도 가져가나요?' 아들의 말이 다시 가슴을 파고든다.
'내가 내 장미꽃을 위해 보낸 시간 때문에 내 장미가 그토록 소중하여진 것, 내가 물을 주어 기른 꽃이니까, 내가 직접 덮개를 씌워주고 바람막이로 보호해 주었고, 벌레를 잡아준 것이 그 장미꽃이니까.'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가 왜 이제야 생각나는 걸까.
우리 가족이 이곳에 산 지 10년이 되던 해에 장성한 아들과 함께 서울엘 갔다. 나는 어머니 뵈러 자주 다녔으나 큰아이는 미국으로 온 후, 처음 나선 나들이였다. 아들은 옛 친구들과 어울리느라 분주한 가운데도 어느 날 인가 화곡동을 다녀온 듯싶었다. 눈에 익은 건물은 화곡초등학교뿐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이제 아들은 어렸을 때처럼 고향을 잃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뭇없이 사라진 옛집이 허망하여 울먹이던 슬픈 눈망울의 소년은 이미 아니다. 유년의 꿈을 키워온 그곳이 낯설게 변한 현실에, 잃어버린 동심이 안타까워 입을 다물고 있던 시절은 오래전에 지났으니까. 이제는 담담한 마음으로 예전에 살았던 곳이 보고 싶었던 것 같다. 그 학교에 다녀본 적은 없으나 유일하게 화곡초등학교가 남아 있다는 위로를 받으며.
비록 눈에 보이던 고향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마음속의 우리 집은 갖가지 장미가 많아 장미의 집이라 불리던 곳. 커다란 그네에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고 노을을 보며 황홀해하던 곳. 밤이 맞도록 별을 세며 별들의 이름을 불러 보던 곳. 정원 한 귀퉁이에 어쭙잖게 놓여있던 미끄럼틀 모래밭에서 강아지와 함께 뒹굴며 지내던 곳이기에 추억 속의 그리움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이들이 어릴 때 몸과 마음이 자라며 처음 접한 곳이었고 꿈꾸고 자라던 시기였기에 소중히 간직되어 있을 것이다. 유년 시절은 영원한 마음의 고향, 향수가 사무칠 때면 돌아갈 마음의 고향이 있다는 것,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도 마음 깊숙한 곳에 아들의 고향은 예전의 모습으로 살아 있을 것이다.
훗날 아들은 자녀에게 아빠의 고향 이야기를 들려주겠지. 안개빛 눈망울이 되어 기억 저 너머를 더듬으며 행복한 동심 속에 빠져 있겠지. 워즈워스의 시 무지개가 진리처럼 다가오리라.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니까.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