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스에서
유숙자
오랜만에 다시 찾은 알프스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이 원대한 산을 품는 일이라 생각했다. 삶을 누르는 실존의 무게에서 벗어나 무아, 무념, 무상의 경지에서 산의 정기만 호흡하고 싶었다. 산은 내 마음을 알아주었고, 내가 산속에서 칩거하며 지내는 동안, 무상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지혜를 터득게 해 주었다. 가끔 살아 있음을 일깨워 주듯 뛰쳐나와 나를 힘들게 했던 고뇌의 끈을 끊고, 더는 가슴 저림을 갖지 않기 바랐다. 나는 초원을 달리는 한 마리의 사슴같이, 숲속을 지나는 바람같이, 자유롭게 이 계절을 노래하고 싶었다.
취리히 호수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했다. 수면에 알프스의 위용이 그림자 드리워져 있고 그 사이를 누비는 백조의 움직임이 한유하다. 호수 주변에 아름다운 오솔길은 마치 가로수가 사열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인이 영감을 얻기 위해, 음악가가 악상을 떠올리기 위해 이 산책길을 거닐었으리라. 그림같이 아름다운 집 주변에 어둠이 안개처럼 내릴 때면 알프스는 밤의 정기를 얻고 기지개 켠다.
알프스 산장에 밤이 내리면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사랑의 노래가 감미롭다. 창밖으로 보이는 희뿌연 어둠 속을 한가롭게 산책하는 연인들과 스키어들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다. 멀리 또 가깝게 보이는 군데군데 카페의 불빛이 별같이 아름다워 아득한 그리움으로 다가든다.
잃어버린 사랑은 모두 별이 된다고 했던가. 어두워야 꿈을 꾸는 별. 젊음의 열기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통나무 카페 싸이텐은 내 마음같이 적요하다. 분위기 따라 맛이 달라지는 스비앙을 마신다. 따스한 향기가 온몸으로 퍼져 여운을 즐기고 있을 때, 내 귓가에 들려오는 노래 “Hello”. 나직한 가락 “Hello”는 내 감정을 감상으로 촉촉이 젖게 했다.
스비앙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황량한 바람을 안고 쉬지 않고 달려온 세월에서 감지하는 공허. 침전되어 있던 회상의 조각들이 비길 데 없이 아름답고 슬픈 음악 사이를 가르며 잊었던 시간 속에서 잃었던 나를 찾아왔던 탓이리라. 꿈속에서만 머물던 신기루 같은 환영. 산을 향해 던져진 내 그리움이 메아리 되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적시는 마음이었을까? 이 세상의 삶은 덧없는 꿈의 여행이라 다짐하며 전능자에게 다가가려고 애썼던 시간. 땅끝에 끌리는 부질없는 생각을 정화하기 위해 산을 품으려 했고, 세월 속에서 덧입혀져 있던 가식의 누더기를 벗어 버리고 싶어 산을 찾았다. 만년설을 이고 있는 웅장한 계곡에서 산의 정기를 흠뻑 흡수하여, 맑고 향기로운 새 삶으로 돌아오고 싶었다.
밤 산책은 고즈넉하다. 온 누리가 어둠이 덮인 고요 속으로 젖어들고 있다. 발자국 하나하나에 꿈을 찍으며 밤새 걷고 싶다. 이 길을 끝없이 따라가면 내가 꿈꾸었던 것을 만날 수 있을까? 밤이 점점 무르익어 은하수가 뿌옇게 흐리고 어디선가 밤 스키를 타러 떠나는지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난다. 저 소리,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이어주는 조화로운 삶의 움직임, 두런거리는 살아있는 음악이다. 자연과 가장 잘 어울리는 조화로운 심포니이다.
나는 산이 좋아 산을 찾는다. 산의 포용이 좋고, 산의 침묵이 좋고 산의 향기가 좋아 산을 찾는다. 꽃잎처럼 분분히 흩날리는 눈가루가 은총처럼 뿌려진다, 지상의 먼지를 말끔히 덮어 주려고 나들이를 나왔나 보다. 조금 더 산에서 내려가면 눈도 멎고 봄이 비밀스러운 속삭임으로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으리라.
이제 막 문을 연 알프스. 오늘 밤 은회색 가문비나무엔 찬란한 3월이 별빛처럼 쏟아져 꽃눈을 틔우고 잠속으로 빠져드는 알프스는 겨울을 한 모금씩 삼키고 있을 것 같다.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