맏동서

유숙자

공항 청사를 빠져나와 낯익은 거리를 지나면서 다시 나의 일상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 감사하다. 계절의 여왕인 5월이 한 허리를 휘어들고 어느새 거리에는 소담스레 피어있는 자카란다의 꽃 물결이 한창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긴 꽃 초롱에서 하늘거리며 떨어지는 꽃잎들이 보랏빛 융단을 만들어주어 낙화의 아름다움이 새삼스럽다.

 

서울을 다녀왔다. 갈 때는 늘 설렜고 계획도 많았으나 이번만은 달랐다. 삶 속에서 풀리지 않는 많은 답답한 것들을 무겁게 지니고 떠났다.

시댁 큰형님이 혈압으로 쓰러진 지 어언 3년이 지났다. 그동안 몇 차례의 뇌 수술을 받았으나 아직 진전의 기미가 별로 없고 몸의 균형은 물론 의식이 분명치 않은 날이 많았다. 청력은 어느 정도 가능한데 뇌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기능을 대부분 상실했다고 한다. 어쩌다 한마디 말을 해도 발음이 어눌하고 대부분 동문서답이다. 이번에 형님을 대면했을 때 나를 찬찬히 보시더니 먼 기억 속에서 어렴풋이 떠오르는지 환히 미소 지으신다.

살아 계실 때 한 번이라도 더 뵙고자 상계동 언니 집에서 연세대 세브란스병원까지 긴 길을 짧게 여기며 다녔다. 내가 서울을 떠나기 전날, 형님은 분명한 발음으로 “막내 동서” 한마디를 하셨다. 그동안 형님을 만나며 답답했던 마음이 일시에 풀리는 듯했다. 어쩌면 다음에 만나 뵐 때는 완전히 의식이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선물로 주셨다.

 

몇 년 전, 형님은 큰아이 결혼식에 참석하겠다는 소식을 일찌감치 주셨다. 여유 있게 오셔서 결혼식 보고 동부에 있는 손녀에게 들러가겠다고 하셨다.

큰아이 결혼 준비가 거의 마무리 될 무렵, 언제쯤 오시려나 궁금해서 전화를 드렸다. 그때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형님이 넉 달 전에 길에서 쓰러져서 여러 차례의 수술을 받았고 이제 겨우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고 조카는 울먹이며 말했다. 작은 엄마가 소식을 들으면 경사스런 결혼식을 앞두고 급히 서울로 오실 것 같아 연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불과 1년 전, 막내 동서인 나를 서울로 불러 환갑잔치를 떡 벌어지게 해 주셨던 형님. 우리는 만나서 반갑고 즐겁고 좋기만 했었는데, 의식이 분명치 않아 병상에 계시다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형님은 시부모님 일찍 여의신 가정에서 맏며느리로 시동생들 공부 뒷바라지까지 하셨다. 어려운 가정 형편인데 막내 시동생이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결혼 의사를 밝혔으니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 본인이 기반을 닦은 다음 준비해야 마땅하거늘 신부가 될 내가 생각해도 결혼이란 가당치도 않았으나 형님은 흔쾌히 승낙하셨다. 오히려 여유 있게 식을 올려주지 못함을 미안해하셨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새색시가 문중 어른께 인사드리고 큰 상(床)을 받는 날이다. 당시 형님의 형편으로는 버거울 정도로 새색시 상을 정성스럽게 차리셨는데 시댁 친척 어른들이 모르고 그만 헐어 잡수셨다. 형님은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형님은 기가 막혀 아무 말씀도 못 하셨다. 형님은 굳어진 표정으로 차분히 내게 말씀을 하셨다.

“자네 환갑 상은 내가 차려줄게.” 나의 두 손을 꼭 쥐고 민망해 어찌할 줄 모르셨다.

 

형님은 점잖고 말수가 적어 냉정해 보이지만 베풂에 후하고 속정이 깊은 분이다. 중년에 아주버님을 여의시고 힘든 일도 많았으련만 꿋꿋이 가내의 대소사는 잘 처리하고 조카들도 훌륭히 키우셨다.

외아들이 결혼하고 9년 동안 후사가 없어도 불편한 언사 한 번 내색한 적이 없었다. 하늘도 감동하셔서 그렇게 원하고 바라던 손자가 태어났건만 그 기쁨도 잠시, 사고를 당하셨으니 주변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어찌 다 표현할 수 있을까. 그해 봄, 가을에 있을 우리 아이 결혼식에 참석하시겠다던 형님의 전화가 마지막 대화였고 이날까지 침묵 속에 사신다. 75세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젊고 고운데 의식 없이 멍하니 앉아 계시니 너무 안타깝다.

형님은 무슨 생각을 하며 지내실까, 전 생애의 어디쯤 계실까, 침묵 속에 있는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생각할까, 미로같이 얽힌 어두운 골목을 이리저리 외롭게 표박 하다가 마침내 길을 찾아 돌아올 것인가, 우리는 그저 희망을 품고 기다리면 되는 것일까, 이론이 정연하지 않은 상념 속으로 끝없이 빠져든다.

 

조카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정답을 낼 수 없는 질문에 여러 번 부딪친다. 딸들은 어머니에게 많은 연민이 있다. 특히 큰조카는 어머니같이 깔끔하신 분이 온몸을 타인에게 맡긴 체 하루하루 보내는 것을 무척 괴로워했다.

“작은 엄마, 우리 엄마가 과연 지금의 이런 삶을 원하고 계실까요?” 큰조카는 울먹이며 내게 묻는다. 희망이 보이지 않아 답답하고 병원에 입원시켜 드리는 것 이외에 자식으로 더는 어떻게 해드릴 수 없음이 안타까워하는 말이다.

나로서 시원한 대답을 줄 수 없음이 더욱 답답하다. 이 상태로라도 어머니가 오래 사셔야 한다고 지친 조카들의 어깨를 다독여 주는 것이 고작이다. 나의 경험의 고백이고 그들의 마음에 위안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말이다. 병석에서 의식이 가물 거리도 살아 계셔서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고 “어머니”-, 하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임을 나는 너무 잘 안다.

 

효심이 지극한 조카들이 고맙다. 한창 자라는 아이들 교육과 남편 뒷바라지에 정신없을 나날인데 어머니에게 한결같다. 퇴원한 후에는 일주일에 두 번 물리 치료사가 집으로 오고 조금만 우울해 하셔도, 팔이 평소보다 덜 움직여도 입원을 시켜 원인을 규명한다. 다행한 것은 좋은 간호인을 만나 병원에서나 집에서나 늘 함께 생활하며 돌보아 드릴 수 있다. 또한, 긴 입원생활에서 부수적으로 따르는 경제적인 문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기에 온 가족이 빠른 쾌유만을 위해 정성을 쏟을 수 있다.

3년이란 짧지 않은 세월 속에서 자녀가 겪어낸 인간적 고뇌와 수고가 보람으로 열매 맺어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듯 병상을 훌훌 털고 일어나는 날이 꼭 오리라 기대한다.

 

미풍이 불 때마다 가볍게 흔들리는 자카란다의 꽃 초롱이 평화롭다. 그 위로 보이는 하늘빛이 맑고 곱다. 하늘 끝 가 저편에 계신 형님, 가끔 침대에 앉아 멍하니 초점 잃은 시선을 창밖으로 향하던 눈망울이 하늘빛 만큼 시리게 다가든다. 영혼이 점점 사그라져 등걸만 남은 것 같은 육체에 다시 생기가 스며들어 기억의 싹을 틔우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신의 은총이 기적같이 임하셔서.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