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이라 부를 수 있는 것

                                                                                                                                                               유숙자

해마다 초여름이면 복숭아를 가져오는 친구가 있다. 잔가지에 달린 복숭아를 둥근 대바구니에 담아 오기에 푸른 잎과 더불어 보통 운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복숭아는 좀 덜 익은 것 같이 푸른 기가 돌고 자잘한데도 당도가 높고 맛이 좋다. 향기 또한 잘 익은 수밀도 같아 식탁 위에 한두 알 만 놓아두어도 향내가 온 집안에 진동한다. 복숭아가 덮개를 쓰고 오기에 건네받을 때마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세월 속의 한 장면이 떠올라 웃음 짓곤 한다.

 

요즘이야 세계가 일 일권 내에 들고 내왕이 잦아 외국에 가서 사는 것이 별 관심거리에 들지 않으나 내가 처음 영국으로 떠났던 1980년은 외국 여행이 자유롭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공항으로 전송나온 친구들은 다만 몇 년간이지만 헤어지는 것이 서운하여 편지하라고 신신당부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꿈에 그리던 유럽으로 떠나게 된 것이 신나서 친구들을 끌어안으며 씩씩하게 ‘다녀올게.’를 외쳤다. 내가 조금도 섭섭함을 보이지 않는 것이 오히려 친구들의 마음을 서운하게 만들었다.

 

외국 생활이 처음이라 모든 것이 생소하고 두려웠다. 당시 우리는 한국사람이 전혀 없는 런던 북쪽에 살았다.처음엔 남편과 함께 다니며 아이들 학교와 쇼핑을 해결했으나 일정 수습 기간이 지난 후부터 온전히 내 몫이었다. 막연히 유럽을 동경했을 뿐, 낯선 나라에 와서 산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나는 발음을 정확하게 해도 상대방이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데서 비극이 시작되었다. 그 나라의 습관을 알지 못하기에 황당한 일들이 벌어졌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때 치렀던 신고식을 생각하면 갱년기를 맞은 여인의 얼굴처럼 벌겋게 달아오른다.

 

제1화

우리 가족이 런던 교외 ‘서나 가든’에 도착했을 때 받은 강렬했던 인상이 지금까지 또렷이 남아 있다. 거기엔 내가 꿈꾸고 상상한 이상의 존재감과 근원적인 풍경이 있었다. 그 동네는 고색창연한 집들이 띄엄띄엄 있었고 아름드리나무의 울창한 나뭇잎들이 하늘을 덮어 아치를 이루었다. 집에서 불과 2, 3분 거리에 템즈 강이 흐르고 있는 것도 축복이었다. 산책할 때면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할 정도로 지상 낙원이 따로 없었다. 집을 소개한 분 말에 의하면 그 동네에 동양인이 들어온 것은 우리가 처음이라 한다. 동네 주민은 우리가 외국인이기에 관심을 두고 친절을 베풀었으나 문화와 관습이 다른 곳에서 언어마저 자유롭지 못한 상태라 때론 친절도 부담스러웠다. 일거수일투족이 조심스러웠다.

 

도착하고 처음 맞는 연말에 이웃 판사 댁에서 우리 내외를 초대했다. ‘서나 가든 입성 환영 파티’란 다. 그 댁에서는 해마다 인근 몇 가정을 초청해서 한 해 동안 지내온 이야기를 나누며 송년을 보낸다. 파티는 현관과 부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들어 오는 사람마다 수인사를 나눈 후 샐러드와 와인을 즐기며 담소한다. 초대받은 사람들이 거의 다 모였을 때쯤 주인이 거실을 개방했다.

 

그날 일곱 가정이 초대되었으나 파티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한 젊은 부부가 커다란 대바구니를 들고 들어왔다. 두툼한 헝겊이 덮여 있어 무엇을 가져왔는지 모르겠으나 안주인이 반색하며 대바구니를 안고 이 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니 꽤 귀한 물건 임이 틀림없다. 옆집 부인에 의하면 초대받았을 때 와인 두 병이면 충분하다 하여 그 말을 따랐는데 바구니를 받고 희색이 만면한 것을 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았다.

 

아이들 학교의 물리 선생 왓슨은 매우 친절하고 호의적인 분이다. 바쁜 와중에도 방과 후면 우리 아이에게 개별 학습지도를 해주고 힘든 일이 없는가를 자주 물었다. 이제 막 중학생이 된 아이들이 낯선 나라에서 적응한다는 것이 쉽지 않을 때여서 자상하게 보살펴 주는 왓슨이 무척 고마웠다.

어느 날 왓슨이 우리 가족을 초대하고 싶다고 아이 편에 편지를 보냈다. 진작 초대하고 싶었으나 부인이 출산하여 늦어졌다며 자신의 집 약도와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다.

 

약속된 날, 나는 유리 상자에 담긴 한국 인형과 와인을 준비했다. 바구니에 선물을 담아 가져가고 싶었으나 바구니를 어디서 사야 하는지 무얼 담아야 하는지 몰라 전통 의상이 고운 한국 인형으로 택했다. 미세스 왓슨은 인물이 수려한 중국 미인이었다. 게다가 요리 솜씨가 대단하여 북경식 요리가 일품이었다. 부인이 동양인이어서 우리 아이들에게 특별히 관심을 뒀던 것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두 달 후, 학년이 끝났기에 우리도 왓슨 부부를 초대했다. 갈비, 잡채, 전유어 등 한국 고유의 음식을 맛깔스럽게 준비해 놓았다. 아기는 누구에게 맡기고 온 듯 손에 커다란 대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전에 판사 댁에서 이미 선물 바구니의 위력을 알고 있었기에 드디어 나도 대단한 선물을 받는구나 싶어 내심 기분 좋았다.

“뭘 이렇게까지 준비하셨어요. 그냥 오시지 않고. 선물 감사합니다.”

동양식의 겸손한 인사를 마치고 두 손을 내밀어 선물 받을 준비를 했다.

부인은 선물은 주지 않고 입안 가득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아이들 방이 어디 있는가를 물었다.

“이 층입니다마는---.“

나는 내민 손을 거두어들이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한 상태에서 부인을 쳐다보았다. 부인은 바구니에 시선을 주며 “아기를 눕히려고요.” 했다.

아니, 이런 실수가. 머리를 세차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바구니에 담긴 아기를 선물로 잘못 알고 고맙다는 인사까지 했으니. 얼굴이 화끈거려 견딜 수 없었다. 아기를 바구니에 눕혀 들고 다닌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대단한 선물 바구니로 착각했던 판사댁 일화를 털어놓았다. 모두 구를 듯이 웃었다.

 

제2화

영국 갈비는 일품이다. 영국사람은 먹지 않는 갈비를 한국 주재원들이 싼값에 먹을 수 있도록 개발시켜 놓았다. 기름을 다 떼어 내고 살만 붙어 있는 것을 반듯반듯하게 잘라 놓아 찜이나 불갈비 감으로 최고였다.

 

어느 날 아침 혼자 장을 보러 나섰다. 평소에는 주말에 남편과 함께 가는데 토요일은 정오까지만 문을 열기에 늘 분주하게 종종거려야 했다. 느긋한 마음으로 좀 먼 곳 킹스턴에 있는 부처(Butcher)까지 갔다. 내가 부처에 도착했을 때 서너 명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차례가 되자 나는 갈비(Ribs of Beef)를 주문했으나 주인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나는 다시 정확하고 또박또박하게 ‘립스 어브 비프, 플리스’ 했다. 그때도 못 알아듣기는 마찬가지였다. 얼굴이 확확 달아올랐으나 다시 용기를 내어 서너 번을 반복하다가 나중에는 하도 답답하여 내 갈비뼈를 손가락으로 그으며 ‘립스’를 외쳤다.

 

바로 그때 내 뒤의 노신사가 ‘오, 륍’ (Oh, Rib) 하며 혀를 데구루루 굴리는 것이 아닌가. 오, 륍이었군요 하듯이 여기저기서 오, 륍을 마디씩 거든다. 륍(Rib)을 립(Lip)이라 발음했으니 못 알아듣는 게 당연했지만, 너무 무안하여 갈비고 뭐고 빨리 그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다만, 나를 곤경에서 구해준 노신사에게는 감사의 인사를 차려야 할 것 같아 돌아서다가 비틀거려 그만 노신사의 구두를 밟고 말았다. 뒤돌아서며 보니 내가 미적대고 있는 동안 줄을 선 사람이 많아 당황했던 탓이다. 얼떨결에 나는 ‘땡큐, 땡큐 베리 마치’를 연발하고 있었다. 죄송하다는 말을 해야 하는데 내 의식 속에는 감사 인사만 생각하고 있었기에 인사를 바꿔서 했다. 부처를 어떻게 걸어 나왔는지 그 후의 일은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당시, 영국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은 대사관, 유학생, 지사, 상사를 합쳐 봐야 2천 명이 채 되지 않던 시절이었으니 누구에게 묻고 경험을 쌓고 할 개재가 아니었다. 평일에 런던 거리에서 한국 사람을 만나기 쉽지 않았다.

 

이따금 실수도 해가면서 사는 동안 차츰 그 문화에 동화되어 편안해졌다. 한국인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며 외국인과 스스럼없이 살아가게 될 때쯤 되니 영국을 떠날 날이 임박했다. 영국의 전통에서, 문화에서 풍겨 나오는 정서가 나와 잘 맞아 삶이 보람되고 즐거웠으며 행복했기에 5년의 세월에 아쉬움을 남겼다. 내 인생의 여정에서 유럽이 없었다면 삶이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 그곳에서 삶은 신이 내게 내려준 축복이었다고 확신한다.

 

지금 인생의 황혼, 고즈넉한 뜨락에 앉아 지난날을 돌아보게 되는 때이면 안개비 자욱이 내리던 런던이 그림처럼 떠오른다. 그곳은 내가 꿈꿨던 모든 것을 갖추고 있어 한 번 더 살아보고 싶은 날들이었음을 가슴 저린 그리움으로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수북이 쌓인 눈 속에서도 파랗게 솟아오르는 잔디를 보았을 때 경이로움. 머리 위에 검은 구름이 한 조각만 있어도 비를 뿌리고야 마는 신기함. 기도하는 자세로 경건하게 서 있는 높다란 주홍색 가로등, 그 불빛 사이로 아스라이 피어오르던 자욱한 안개는 가히 환상이었다. 템즈 강가 노란 수선화의 물결도 장관이었다. 물가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연모하여 빠져 죽은 나르시수스의 혼령인 듯 수선화가 무더기로 피어 있었다. 그 사이를 한유하게 노니는 백조의 무리. 야트막한 구릉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양 떼들의 모습은 살아 있는 전원의 풍경이었다.

 

몰라서 저지른 실수, 부끄러워 입 다물고 있던 실수도 추억 속의 그리움으로 표현될 수 있음은 세월이 많이 흘렀기 때문이리라. 누가 말했던가, 지나간 것은 아름답다고.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