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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32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전 대통령과 그의 부인 엘리노어 루스벨트 여사가 백악관을 나서고 있다.

 

1932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전 대통령과 그의 부인 엘리노어 루스벨트 여사가 백악관을 나서고 있다.

 

미국 제32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부인 엘리노어 루스벨트 여사는 미국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대통령 부인으로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엘리노어 여사는 남편 프랭클린의 오랜 정치 생애를 곁에서 도운 인생의 동반자였을 뿐 아니라 인간의 평등, 인권, 세계평화 등을 위해 헌신한 지도자였습니다.

 

엘리노어 루스벨트 여사는 1884년 뉴욕시에서 태어났습니다. 정식 이름은 애나 엘리노어 루스벨트였습니다. 삼촌인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대통령이 됐을 만큼 부유하고 막강한 영향력을 갖춘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엘리노어의 어린 시절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질병과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고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습니다. 엘리노어가 8살 때 어머니가 디프테리아로 세상을 떠난 데 이어 2년 후에는 아버지도 사망했습니다. 그 뒤 외할머니 손에서 자란 엘리노어는 집에서 개인 교사를 두고 공부하다 영국 런던의 기숙학교 앨린스우드 아카데미에 들어갔습니다.

 

학교를 마치고 뉴욕으로 돌아온 엘리노어는 맨해튼에 있는 Hell's Kitchen이라는 곳에서 어린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지옥의 부엌이라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곳은 극도로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지역이었습니다. 금수저 아가씨가 흙수저 지역에 찾아가 봉사를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는 한편 처우가 엉망이라고 소문난 공장들도 살펴보고 사회 개혁을 위해 노력하는 여성들과도 교류하면서 어려운 계층을 돕는 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1906년 엘리노어 루스벨트 여사가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 전 대통령과 두 딸과 함께 찍은 가족 사진.

 

1906년 엘리노어 루스벨트 여사가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 전 대통령과 두 딸과 함께 찍은 가족 사진.

 

엘리노어는 이 무렵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사귀기 시작했습니다. 프랭클린은 5대조 할아버지에서 갈라진 같은 집안 청년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1905년 결혼했습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뉴욕에서 주 의원에 당선되면서 정계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그 후 우드로우 윌슨 대통령은 프랭클린을 해군 차관보로 임명했습니다. 정부 일을 하게 되면서 루스벨트 부부는 1913년 워싱턴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러나 워싱턴에는 큰 시련들이 엘리노어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여비서와 사랑에 빠진 것을 알게 된 것도 이때였습니다. 엘리노어는 프랭클린과 결별을 작정했습니다. 그러나 프랭클린은 떠나지 말아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엘리노어는 남편의 호소를 받아들였지만 더 이상 과거의 그녀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한 정치인의 부속물이 아니라 독립된 인격체로서의 삶을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엎친 데 덥친 격으로 또 하나의 시련이 닥쳤습니다. 1921년 남편 프랭클린이 소아마비를 앓게 되고 평생토록 걸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의 정치 생명은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엘리노어의 지극한 보살핌과 격려로 프랭클린은 다시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는 휠췌어에 탄채 뉴욕 주 지사에 출마해 당선됐습니다.

 

엘리노어는 차츰 사회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여성 노동자 연맹에 가입하는가 하면 전쟁 방지 운동에도 뛰어들었습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1932년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뉴딜정책을 제시하자, 엘리노어 여사는 남편의 새로운 정책을 국민들에게 홍보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엘리노어 여사는 전국을 돌며 강연을 하고, 경제적 도움이 필요한 지역을 직접 방문해 해결책을 모색했습니다.

 

남편이 대통령으로 있는 동안 여성 기자들을 상대로 회견을 한 횟수가 3백여 회가 넘고, 매일 신문에 칼럼을 썼습니다. 백악관에서의 생활에서부터 뉴딜 정책, 세계 정세에 까지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는 이 칼럼은 135개 신문에 실릴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잡지에도 많은 글을 썼습니다. 엘리노어 여사는 자신과 정부의 아이디어를 알리면서, 여성들도 중요한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엘리노어 여사가 가장 적극적으로 개입한 사회 문제 중 하나는 인종 차별이었습니다. 에리노어 여사는 흑인들의 어려움을 듣기 위해 공개적으로 흑인사회의 지도자들을 만났습니다. 또 지도자들과 흑인 학생들을 백악관으로 초대했습니다.

 

흑인 지도자가 방문하게 되면 혹 들어오다 경비원들과 말썽이라도 생길까 봐 직접 백악관 입구까지 나가 팔짱을 끼고 함께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1930년대 40년대 미국 정치인 중 그렇게 행동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지난 1939년 엘리노어 루스벨트(왼쪽) 여사가 여가수 매리안 앤더슨에게 영예의 메달을 수여하고 있다.

 

지난 1939년 엘리노어 루스벨트(왼쪽) 여사가 여가수 매리안 앤더슨에게 영예의 메달을 수여하고 있다.

 

1939년 엘리노어 루스벨트(왼쪽) 여사가 여가수 매리안 앤더슨에게 영예의 메달을 수여하고 있다.

 

엘리노어 여사는 국제적으로 큰 뉴스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습니다. 1939년 미국의 흑인 여가수 매리안 앤더슨은 워싱턴 디시에 있는 콘스티튜션 홀에서 공연을 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설을 관리하고 있는 보수적인 여성단체 Daughters of the American Revolution, 즉 '미국 혁명의 딸들'은 흑인이라는 이유로 마리안 앤더슨의 공연을 거부했습니다. 엘리노어 여사도 바로 그 단체의 회원이었습니다.

 

거부 소식이 알려지자 엘리노어 여사는 공개적인 항의 표시로 그 단체로부터 탈퇴했습니다. 엘리노어 여사는 콘스티튜션 홀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대규모 광장, 링컨 기념관 앞에서 앤더슨이 야외 공연을 할 수 있도록 주선했습니다. 이 공연에는 7만 명이나 되는 시민들이 운집해 앤더슨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엘리노어 여사는 이처럼 민권운동의 강력한 후원자였고, 루스벨트 대통령 시절의 여성과 소수자에 관한 진보적인 정책은 대부분 엘리노어 여사가 발의한 것들이었습니다.

 

1940년 루스벨트 대통령은 3선에 도전했습니다. 엘리노어 여사는 남편의 당 공천을 얻기 위한 민주당 전당대회에서도 연설했습니다. 대통령 부인이 당 대회에서 연설한 건 엘리노어가 처음이었습니다.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엘리노어 여사는 라디오 방송에 나가 ‘나의 두 아들도 태평양에 가 있다’며 전국의 청년들에게 나라의 부름에 응답하라고 호소했습니다. 엘리노어 여사는 전쟁 기간 중 해외의 수많은 미군 기지를 방문하며 장병들을 위로했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4선에 당선된 지 얼마 안 된 1945년 4월 12일 숨을 거두었습니다. 남편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엘리노어 여사는 "부인인 나 자신의 슬픔보다 그를 잃은 이 나라 국민들의 슬픔에 더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습니다.

 

루스벨트의 뒤를 이어 해리 트루먼이 대통령직을 이어받았습니다. 세계의 지도자들이 국제연합, 즉 유엔을 창설하자 트루만 대통령은 최초의 유엔 회의에 엘리노어 여사를 미국 대표로 파견했습니다. 엘리노어 여사는 유엔 인권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됐습니다. 그리고 1948년 세계인권선언이 채택되는데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엘리노어 루스벨트 여사는 말년에 세계 여러 나라를 방문하며 비공식 대사역을 수행하다 1962년 11월 7일 생을 마감했습니다. 향년 78세, 사인은 결핵이었습니다. 세계의 많은 사람은 대통령 부인으로서 보다는 위대한 지도자를 잃은 데 애석함을 금치 못했습니다.

사상 최초 4선 대통령의 정치 생애를 돕고, 세계 인권을 위해 헌신한 엘리노어 루스벨트 여사는 갤럽 여론조사에서 사후 13년 연속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여성으로 꼽히기도 했습니다.24-03-10-16.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