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 아닌 색 / 최이안

 

별을 보러 갔다. 도시의 드문드문 희미한 별이 아닌 촘촘히 영롱한 별무리를. 처음 가본 봉화의 만리산에서 올려다 본 어두운 하늘에 박힌 별들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눈을 맞춘다. 깜박깜박 암호를 보내며 해독을 하라고 한다. 난해한 별빛을 바라보다 말없는 어둠에 눈길이 갔다. 어둠 때문에 별은 빛나고, 저 어둠이 없으면 별 볼 일도 없다. 넓이와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두운 색이 블랙홀처럼 시선을 빨아들인다. 밤하늘의 활기찬 침묵이 오케스트라 연주처럼 공간을 가득 채우며 흐른다.

‘하늘천 따지 검을현 누를황….’ 천자문의 첫 부분에 나오는 ‘검을 현’이 왜 ‘검을 흑’이 아닌지 예전부터 얼핏 궁금하기는 했다. 얼마 전 박대성 화가의 수묵화 전시회에 갔다가 해설 문구에서 “작가의 먹색은 흑색이 아닌 현색”이라는 표현을 보았다. 현색은 사전에 없지만 존재한다. 그냥 검은색이 아닌, 그윽하고 아득하며 어두운 하늘의 색이 현색玄色이다. ‘가물가물하다’는 의미의 ‘가물 현’이 언어 변환에 의해 ‘검을 현’이 되었다는 주장은 그럴 듯하다. 흑색과 현색은 비슷한 것 같지만 다르다.

흑색이 까만색이라면 현색은 깜깜한 색이다. 흑색은 모든 빛이 흡수되어 나타나는 색이고, 빛을 없애기에 악과 죽음, 소멸의 의미를 지닌다. 반면 현색은 모든 빛을 품고 있는 색이라 할 수 있다. 마치 태아를 위한 자궁 속 어둠 같다고나 할까. 만물의 씨앗을 품고 있는 우주의 자궁인 현색 안에서는 무언가 일어나고 있다. 배우와 장치가 있는 채 조명이 꺼진 무대처럼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가늠하기 힘든 어둠이다. 잠잘 때 눈 감으면 나타나는 현색은 잠이 깊어지면 상상 이상의 총천연색 동영상을 빚어낸다. 긴장과 기대 속에 지켜볼 수밖에 없는 현색은 이런 변화무쌍하고 심오한 신비를 담고 있다.

현색은 까마득한 색이다. 창세기에 보면 신이 빛을 창조하기 전에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라고 나온다. 빛보다 먼저 존재했던 이런 어둠을 표현하려면 흑색이 아닌 현색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현색은 최초의 색이기도 하다. 만물이 창조되고 드러나기 전의 에너지 가득한 어둠은 흑색으로 표현할 수 없다. 흑색은 모든 빛을 흡수한 색이므로 빛보다 나중에 생겨야 하는 것이다. 창세기의 첫째 날도 저녁으로 시작해 아침이 되어 이루어졌다. 하루는 빛이 나오기 전의 어둠으로부터 빛이 비추는 아침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시간에서는 어둠이 먼저인 것이다. 흑색에 앞서, 만물 창조에 앞서 태초에 존재했던 어둠을 칭하는 색이 현색이다.

현색은 궁극의 색이다. 색이지만 실체를 가늠할 수 없는 공간을 표현한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원리가 현색에도 해당된다. 만물은 현색 안에서 나왔고 그 속으로 돌아간다. 현색은 기류와 순환, 생성과 소멸을 품은 영원의 상태를 나타낸다. 색상표에도 없는 추상적인 색이다. 먹색을 현색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도 수묵화가 드러나지 않은 것에 대한 상상을 자극하기 때문일 것이다. 먹이 물의 농도에 따라 달라지는 변화는 저녁에서 새벽까지 어둠이 빛의 농도에 따라 보여주는 오묘함을 닮았다. 그러나 먹도 현색을 대신할 수는 없다. 현색은 다른 색이 모두 사라져도 남아 있을 색이며, 삼라만상의 색을 다시 만들 수 있는 색이다. 모든 시간과 공간을 담고 있는 색, 현색은 색 아닌 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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