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양 박계용

  

무의식과 의식 나의 모든 근원은 하양으로부터 시작된다. 무채색인 하양은 본디의 아름다움이요 영원한 안식이다. 내 영혼 가장 깊숙이 자리한 첫 기억도 하양이다. 옥양목 바지저고리를 으신 아버지 무릎에 앉혀 시조를 읊으시던 가락에 흔들리던 아기의 모습이다.

때때로 해 질 무렵 창가를 서성이면 어렴풋이 들리는 노랫소리, '해는 져서 어두운데.'

숲속에 숨어 있던 흰옷 입은 무리가 비탈길을 달음질쳐 내려온다. 위험에 처한 주인공을 마적 떼로부터 구해주던 영화의 한 장면이다. 장터 마당에서 보았던 독립군 이야기를 통해 백의민족이란 의미가 선명하게 각인되던 어린 날이었다.

기와지붕 위에서 펄럭이던 하얀 저고리, 할아버지 제사 때쯤이면 어둠 속에서 빛나던 백목련은 슬픔의 흰옷을 입었다. 손녀딸들은 미농지를 접어 소담스런 꽃송이를 만들고 증손들이 길게 늘인 광목 끈을 어깨에 메었다. 상엿소리도 없이 소복 차림의 상제들은 울음을 삼킨 극진한 예로 하얀 꽃상여를 뒤따랐다. 조팝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개울가를 지나 소라실고개를 넘어가는 찔레꽃 향기는 처연한 슬픔이었다. 이제 하양은 울음을 뚝 그친 희망이요, 기쁨이다. 칠흑 같은 어둠일지라도 하얀 박꽃이 등불 밝힌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는 길목이다. 안개꽃으로 단장한 꽃방석은 큰딸의 혼인예식을 준비하는 선물이요. 은방울꽃으로 신랑의 부토니에와 새색시의 부케를 밤새워 엮으며 마중한 잔칫날은 첫눈처럼 순결한 맑음이요 기쁨이 멀리멀리 퍼져가는 새벽 종소리였다.

하양은 비밀스러운 베일, 그 안에 숨어들면 평화만이 감도는 고요한 삶의 여백이다. 자정미사에 참례하여 세례를 받던 성탄절, 달빛을 받아 온 천지가 하얗게 반짝이던 설야雪夜는 내 영혼의 샘물이다. 한 점 티끌도 없이 하늘을 날 것 같던 순수한 기쁨으로 돌아가 지치고 때 묻은 영혼을 씻으며 생기를 얻는다. 바가지가 동동 떠다니고 물이 넘쳐흐르던 우물가에 당도하여 시원한 생수를 긷는다. 바람이 부는 날에는 모시옷을 지어준 큰언니의 정을 입고 흰 고무신을 신고 길을 나선다. 하얀 탱자 꽃이 가시마다 열렸던 사랑채 언덕에 당도하여 꽃그늘에 앉아 절로 자란 가시를 버린다.

맑은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이불 홑청이랑 옷가지를 널어놓은 빨랫줄이 끊어져 순식간에 흙투성이가 된 날이 있었다. 무거운 김치 병을 떨어뜨려 김칫국물이 사방에 튀고 유리조각은 살갗을 파고들어 붉은 선혈로 앞치마를 물들이는 날도 있었다. 출타 중이시던 아버지, 흰 두루마기 자락 날리며 급히 돌아오셨다. 함박눈이 휘몰아치는 산길을 걸어오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얘야, 비켜 서거라! 다칠라."

상처 난 손엔 붕대를 감고 갈아입은 흰옷엔 하얀 앞치마를 두르고, 아버지 새로 매어주신 튼실한 빨랫줄에 더러워진 빨래를 다시 헹구어 넌다. 뒷동산에서 베어오신 곧은 대나무 바지랑대 높이 세워 놓으시면 바람은 춤을 추고 햇살은 아롱아롱 숨바꼭질한다. 때마침 날아온 하얀 나비 한 마리 향기 가득한 치자 꽃잎에 앉아 있다.

하양은 내게 지어주신 배냇저고리다. 얼룩진 저고리를 양잿물에 푹푹 삶아 방망이질을 한다. 해진 옷을 하얗게 빨아 기워 입고 산들바람 벗 삼아 내가 가야 할 길을 걸어간다. 보드랍게 낡은 오래된 흰 옷이 참 편하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날에 입을 나의 예복은 하양, 아버지께서 꿰맨 자국이 없는 하늘의 옷[天衣無縫]을 마련해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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