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수필 100인선] 변해명의 "빨래를 하며"
  

세상 바람에 시달리다 풀이 죽어 늘어진 옷을 벗어 빨래를 한다.
살아가기 힘겨워 땀에 배인 옷, 시끄러운 소리에 때 묻고 눌린 옷, 최루탄 연기에 그을고 시름에 얼룩진 옷을 빤다.

  
 
장마 비 걷히고 펼쳐지는 푸른 하늘처럼 밤마다 베개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는 악몽에 시달리는 나의 잠을 깨운다. 그 물소리처럼 지심에서 솟구치는 물꼬를 찾아 콸콸콸 넘쳐흐르는 물에 빨래를 담가 절레절레 흔들며 빨래를 하고 싶다.

여름의 한 줄기 소나기는 도심을 태우던 열기를 식혀주고 악취와 쓰레기를 쓸어가며, 시원하고 깨끗한 거리를 열어준다. 그처럼 소나기를 맞으면 머리카락 올올이 빗물로 감기고, 주머니에 담긴 먼지처럼 답답한 가슴도 후련해지리라. 씹지 않고 삼킨 말의 응어리도 풀 수 있는 소나기― 빗질하는 가로수처럼 빨고 싶은 나날들.

옛날 어느 날 신부님은 내 이마에 물을 부으시며 마음을 빨아주셨다. 다시는 너의 삶에서 후회로움이나 욕됨이 없을지니라.

그러나, 어인 일인가. 내 마음은 갈수록 번뇌와 욕심으로 더럽게 얼룩져 샘터로 달려가 무릎을 꿇지만 마음의 주름살은 펴지지 않고 빛바랜 기도엔 바람만 오간다.

가난한 날들의 어두움, 기다리는 세월의 덩이진 아픔, 쫓기는 두려움, 누더기처럼 짜깁는 인정들―. 나는 언제나 외롭고 허기져 눈물을 흘려도 지워지지 않는다.

빨래를 한다. 흐르는 물에 담가 빨래를 한다.
깨끗한 빨래. 활활 털어 햇볕에 널면 빨래는 바람에 물기를 날리고 거듭나는 몸짓으로 활개를 편다.

햇볕 아래 눕는 눈부신 정결. 비로소 자유롭다.
어머니는 날이면 날마다 빨래를 했다. 손톱이 다 닳도록 비비고 두드렸다. 마디 굵은 손가락에 끼운 가락지도 손톱처럼 닳아 끈으로 두 쪽을 묶어 끼웠다.

흐르는 물소리에 실려 가던 빨래 방망이질 소리. 가슴에 서린 한을 자근자근 빨아내던 소리― 지금은 지워져 들리지 않는다.

나도 어머니처럼 빨래를 한다.
빨래를 비비면 열 손가락 사이로 옛날이 흐르고 아리고 쓰린 삶의 가락이 굽이굽이 흐른다.

콩깍지 태워 잿물 내리고 광목을 필로 삶아 자갈밭에 널면 한 줄기 고달픈 흰 강이 출렁거렸다. 시집가는 딸이 한 끝을 잡고 지팡이에 의지한 노할머니 한 끝을 잡고 눈으로 마름질하는 어머니 강줄기.

꽃가마 꽃상여를 앞뒤로 묶고 햇볕 아래 박꽃처럼 속살 보이던 광목 마전에 어머니 근심도 하얗게 바랬다.

물은 언제나 고향.
오늘의 빈 잔을 채우고 마른 혼을 적셔준다.

물을 보면, 물보라 위에 살아나는 추억의 송사리떼―. 기억의 징검다리 사이로 빠져나가며 생활의 뱃전에서 찰랑거린다.

나는 깨끗한 빨래이고 싶어 강물에 눕는다.
심신이 투명해지면 학처럼 날개를 달고 구만리장천으로 비상하리라.

한 벌뿐인 옷을 들고 물가로 간다.
북한산 계곡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수유리 샘터에 앉아 언제나 진솔이고자 빨래를 한다.

바람은 옷자락에 풀을 죽이고 하루도 못 가 땀에 젖지만 진풀 먹여 밟고 두드려 옷깃을 살려야지, 삼베 모시처럼 상큼하게 고개를 들도록.

빨래를 한다.
새벽마다 남몰래 더러움을 쓸어가는 청소부 할아버지의 비질 소리처럼, 새벽 미사 때 빈 성당을 채우는 신부님의 기도 소리처럼 외로운 샘터의 빨래 소리.

물소리를 들으면 살아나는 청청한 영혼들.
머리를 감아 빗고 새 옷 입고 새벽길 떠나는 신부新婦처럼 물가로 간다. 지친 삶을 헹구려고 샘터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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