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빙기 / 우광미
새벽 가로등 밑으로 희미하게 그녀가 보인다. 채비를 마친 가방을 점검하고 또 했을 것이다. 얼마 만에 함께하는 여행인가. 출발 시간에 늦을세라 공항에는 승용차로 가기로 했다. 입춘을 앞두고 있건만 금년에는 추위가 강해 창밖으로는 얼어버린 강바닥이 펼쳐져 있다. 시동을 건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인지 차 안은 냉기가 흐른다. 도로에 낮게 깔린 새벽안개는 이끼 낀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리고 있는 듯하고, 여명 속에서 얼음으로 덮여 있는 강물은 차가운 빛을 발한다.
그녀는 약속시간에 늦은 적이 없다. 가다가 혹여 있을지도 모를 지체 요소를 감안하여 일찍 나서기 일쑤다. 예정 시간보다 훨씬 일찍 도착하여 기다려야만 직성이 풀렸다. 두 해 전 남편을 먼저 보내고 난 후로 앓아눕는 날이 잦아 멀리 나가기를 꺼려했다.
그런데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번 여정에 그녀가 그토록 자신의 의견을 내세운 이유를. 나의 궁금증은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고령의 나이에도 굳이 먼 여행을 고집했다. 보호자 동반이 가능할 경우에만 허락되는 여행을 강행하려 한 이유를 모르겠다. 그곳이 잘 알려진 온천이나 멋진 관광지로 알려진 곳도 아니다. 비싼 여행비를 치르며 굳이 가와고에를 택한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일본 특유의 깔끔함으로 정리된 공원을 지날 때, 그녀는 가이드의 설명도 뒤로 한 채 무언가를 찾듯 두리번거렸다. 한참 살피다 걸음을 멈추고선 나무에 손을 얹고 세월의 옹이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마치 기억이 인화지 속에 정지되어 있는 한 순간을 꺼내보려는 듯 말이 없었다.
버스를 타고 편백나무가 잘 가꾸어진 고개를 굽이굽이 돌아갈 무렵 가이드는 각자의 소개와 여행 동기를 간단히 말해 달라면서, 가장 연배가 높은 그녀에게 마이크를 내어준다. 바깥 풍경을 한동안 바라보던 그녀가 상기된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이곳은 그녀가 유학중인 남편과 신혼생활을 시작한 곳이었다. 그때 이 공원에 묘목을 하나 심었다는 것이다. 먼 길 가기 전에 꼭 한번 찾고 싶었다고. 차 안은 일순 침묵이 흘렀다. 마이크가 다음 사람으로 넘어가고도 우리는 얼마간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창밖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불쑥 지난 과거를 털어놓아 숙연하게 만들었던 그녀가, 다시 고요를 깨며 느닷없는 요구를 했다.
“나 아코디언 연주 배우러 가면 안 될까?”
구십의 나이를 채운 그녀였기에 나는 황당했다.
“악기 배우는 일이 그리 노록지가 않아요. 엄마.”
유학 온 남편을 따라왔던 신혼시절, 타국에서 생활고와 육아문제로 남편과 다투는 일이 잦았단다. 그럴 때면 음악을 즐기던 남편은 그 공원으로 나가 아코디언을 연주했고, 그녀는 설운 마음을 달래지 못해 애를 태웠단다. 한번은 몰래 악기를 버렸다가 몇 날을 수소문하여 다시 찾아오기도 했다 한다.
“근데 이상한 건 말이야, 그 연주를 듣고 있으면 얼음 같은 마음도 사르르 녹았었어.”
남편을 보내고 나서야 자신의 속마음을 말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남는가 보다. 그녀가 배우고 싶은 건 악기가 아니다. 많은 세월 미움이라 생각했던 감정의 실체일 수 있다. 또한 그 추억 속에 머무르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그녀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있다.
“나 죽으면 절대 무덤조차 니 애비 곁에 나란히 두지 마라.”
평소에 자주 하던 말이라 그렇게 하는 게 도리라고 생각해 오던 터였다. 훗날 짧은 생각으로 그 말을 따랐다면 필시 후회하였을 것이다.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다. 그로써 다른 이와 소통하기를 원한다. 말로 글로 소리나 표정으로 때로는 침묵으로. 그러나 마음을 열고 듣지 않으면 오해와 서운함으로 서로의 관계가 소원하게 될 수도 있다. 때로는 빠짐없이 들었다고 생각하지만 아집과 편견으로 전혀 다른 소리를 듣게 될 수도 있다. 간혹 그 뜻을 알면서도 내 나음과 다른 말을 할 때도 있다. 두 분이 상대의 방식에 더 배려했다면 이렇게 먼 시간을 돌아오지 않았어도 되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따른다. 결혼생활이란 상대의 성격에 맞추어 가는 것임을 알면서도 그리 힘들었을까.
여정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 장시간 히터를 켠 탓인지 탁한 공기로 차 안이 갑갑하다. 한적한 길옆에 차를 세우고 창을 내릴 즈음 ‘쩌억쩍’ 밤의 정적을 깨뜨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바닥의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였다. 여기저기에서 화답이라도 하듯이 그 소리는 잦게 들려왔다. 물조차 자주 마시지 않으며 단체생활에 적응하던 강단 있는 그녀는 이미 잠들었다. 잠든 가슴속에서 들려오는 소리와 함께 강바닥이 녹아내리는 소리가 메아리쳐 울린다. 자연의 섭리대로 강물이 녹아내리고 있다. 허옇게 얼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내면의 본질은 이미 녹아 흐르고 있었다.
오랜만에 건 수화기 너머 엄마의 목소리는, 무리한 여행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듯하다. 사소한 몇 가지 일정들을 뒤로 물리고 들렀다. 침대머리에 사진이 있다. 어디에 감춰두었다가 꺼냈는지 처음 보는 사진이다. 어쩌면 기억 속에서 겨우 꺼낸 추억의 사진인지도 모를 일이다. 어린 묘목을 배경으로 아코디언을 멘 내 아버지 곁에, 긴장한 듯 카메라를 향해 수줍게 미소를 띤 여인이 있다. 세월의 강을 넘어서 그렇게 그녀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