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식집이나 이자카야엔 눈에 띄는 소품이 있으니, 고양이 인형(招き猫; 마네키 네코)과 ‘우끼요에’다. 우끼요에(浮世繪)는 에도(지금의 도쿄)시대 일본에서 시작된 목판화를 말한다. 이발소에 걸려있는 풍경화가 예술 작품은 아니듯, 술집 벽에 걸려있는 우끼요에도 예술품은 아니다. 우끼요에는 주로 유흥 안내나 관광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용도로 그려졌다. 요즘으로 치면 신문 사이에 끼어있는 전단지라고 보면 된다. 가끔은 독특한 아이디어나 디자인으로 눈에 띄는 것도 있지만. 전단지가 예술품이 아니듯 대량으로 찍어내는 우끼요에 역시 예술적 가치는 인정받지 못했다.
우끼요에는 우연한 기회에 서양에 알려지게 된다. 명-청 교체기에 중국의 도자기 수출이 주춤하면서 일본 도자기의 유럽 수출이 늘어났다. 도자기를 실어 나르려면 포장지가 필요한 법. 요즘이라면 뽁뽁이 비닐을 사용하겠지만 당시에는 남아도는 우끼요에로 도자기를 쌌다. 유럽의 도자기 가게에서는 포장지를 뜯어 버렸을 터. 아무렇게나 버려진 우끼요에가 몇몇 화가들의 눈에 띄었고, 그들은 충격을 받았다. 대담하고 파격적인 구도와 강렬한 색채, 과감하고 단순화된 외관선과 평면적인 디자인. 유럽의 그림에선 볼 수 없던 것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고민하던 새로운 화풍에 우끼요에의 기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우끼요에는 이런 식으로 인상주의라는 미술 유파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구실을 하게 된다.
19세기 후반 서양미술에 나타난 일본 미술의 영향, 즉 자포니즘(Japonism)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정작 일본에서는 쇠퇴의 길을 걷던 우끼요에가 비슷한 시기에 유럽에서는 열광의 대상이 된 사실은 아이러니 하지만, 이후 우끼요에는 일본을 대표하는 미술 장르로 여겨졌고 일본 미술뿐만 아니라 일본 문화 전체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자리매김 하게 된다. 특히 인상파 화가들의 우끼요에와 자포니즘에 대한 관심은 남달랐다. 그들이 우끼요에에 심취했던 이유는 우끼요에가 새로운 조형실험에 필요한 혁신의 실마리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강렬하면서도 순수한 색채, 세부를 생략한 과감한 묘사, 원근법을 무시한 평면성의 강조, 대각선이나 사선 구도 등 서양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일본 판화의 특성이 인상주의 작가들의 창작혼을 자극한 것이다.
우끼요에를 통해 자신만의 화풍을 새로 만들어낸 고흐
화가 고흐의 이력을 들여다 보면 의문이 생긴다. 고흐는 27세라는 늦은 나이에 그림을 시작해 37세까지 불과 10년 동안에 900여 점에 달하는 많은 그림을 남겼다. 화가로 입문하기 전 경력도 유별나다. 영국의 한 사립학교에서 독일어와 수학을 가르치기도 했고, 네덜란드의 한 서점에서는 점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신학교를 중퇴하고 벨기에의 탄광촌에서 전도사로 활동하기도 했으나 재계약을 거부당해서 성직자의 꿈을 접기도 했다.
교사, 서점 직원, 선교사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다가 독학으로 화가의 길에 들어선 고흐는 어떻게 미술사의 거장이 될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 시대 전형적인 그림과 차별화된 고흐만의 화풍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고흐는 자신이 화가로서 많은 결점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미술을 정식으로 배운 것도 아닌데다 그마저 남들보다 한참을 늦게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부족함을 타국의 예술을 흡수하는 방식으로 보충했다. 전문적인 미술 교육을 받지 못한 결점은 타 문화를 수용하는 데엔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그렇다면 고흐가 받아들인 타 문화는 무엇이었을까? 그의 그림 <별이 빛나는 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고흐 표 화풍의 특성은 강렬한 형태와 색채의 왜곡, 소용돌이치는 붓 터치다. 이중에서도 밝고 선명한 색채, 비대칭의 대담한 구도, 명암을 제거한 평면성의 강조 등이 바로 우끼요에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 시절, 화가들은 예술가의 사적인 감정이나 개성을 그림에 표현하는 것보다는 대상을 실제와 닮게 그리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기 위해 물감을 세심하게 혼합하고 부드러운 붓질로 대상을 꼼꼼하게 묘사했다. 하지만 자신 내면에 잠재된 격렬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길을 우끼요에에서 찾아낸 고흐는, 개인적인 느낌이나 주관을 표현하는 것에 더 중점을 두었고, 이런 모든 것들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이처럼 고흐는 우연히 접한 일본 판화에서 좋은 점을 배웠다. 그리고 이를 자기가 즐겨 쓰던 기법에 녹여 넣었다. 그래서 누가 보더라도 고흐의 그림이라는 걸 바로 느낄 수 있는 자신만의 화풍을 만드는데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