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죽기까지 이어지는 향기로운 인연
 

성민희/수필가
 
 
[LA중앙일보] 발행 2017/01/20 미주판 8면 기사입력 2017/01/19 21:30
 
   한인 마켓에 갔다. 비 때문에 야채 값이 많이 비싸졌다는 말을 들은 터라 야채코너에 먼저 가 보았다. 소문에는 파 한 단에 1불이라고 하던데 웬걸 굵직굵직하고 싱싱한 파가 세 단에 1불이다. 파부터  카트에 집어넣고 고구마를 골랐다. 고구마 봉지를 들고 돌아보니 낯선 카트가 옆에 있다. 내 것에는 사과 두 봉지하고 블루베리와 파가 담겨져 있는데 여기에는 오렌지하고 파다. 내가 정신없이 남의 것을 끌고 왔구나 싶어서 두리번거렸다. 내 것은 저 건너편에 서 있다. 쯧쯧, 남의 카트에다 내 파를…. 얼른 파 봉지를 꺼내 들고 내 카트로 왔다. 내가 돌아서자 베트남계 여자 둘이서 오렌지를 실은 카트를 밀고 정육점 코너로 갔다.

  계산을 끝내고 집에 와서 정리를 하니 파가 두 봉지나 나온다. 본의 아니게 남의 파를 슬쩍한 셈이 되어버렸다. 졸지에 파 풍년이 된 나야 문제가 없지만 그 베트남계 여자는 얼마나 황당할까. 도깨비에라도 홀린 듯 자기가 한 일을 되짚어보고 또 되짚어보고 하겠지.

  살다보면 내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이런 피해를 당하는 경우가 있다. 모르는 사이에 내 삶의 장(場)에 남이 슬쩍 들어와서 난장판으로 어질러 놓고 나갈 때가 있다. 뒤늦게 알고 당황하고 억울해 하고 분노한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오늘과 같은 경우에는 그 베트남계 여자에게 준 피해가 일회성으로 끝나고 그리 치명적이지도 않지만, 파장이 오래 가거나 다른 사람까지 연루된 경우에는 정말 난감하다. 일일이 찾아다니며 해명할 수 없어 그 오해와 비난을 고스란히 안고 가야할 때도 있다. 시간이 지나 진실이 밝혀지더라도 그때까지 참는 일이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새해를 맞아 지난 일년을 주욱 되짚어본다. 많은 사람을 만났고 사건도 많았다. 그러나 사람들의 얼굴만 마음에 가득 차오니 우리의 삶은 온통 사람과의 관계로서만 엮어지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일년이라는 시간 동안 일어난 모든 일이 사람으로 인하여 생겼고 또 사람으로 인하여 해결되었다.

  그 중에는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인격이 있고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는 행위도 있는 반면 따뜻하고 넉넉하게 품어주는 배려도, 때로는 감동도 있었다. 그러고 보면 삶의 긴 여정은 참 단순하다. 사람들로 인하지 않고는 괴로울 일도 슬플 일도 기뻐할 일도 별로 없다.

  누구를 나의 기차에 태우는가에 따라 분노의 감정에 부대끼기도 하고 충만한 기쁨에 행복하기도 한다. 사람과의 만남에 따라 내 삶의 질도 달라진다.

  '나는 많은 사람을 사랑하고 싶지는 않다. 많은 사람과 사귀기도 원치 않는다. 나의 일생에 한 두 사람과 끊어지지 않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연으로 죽기까지 지속되길 바란다.' 나의 일 년을 함께 해 준, 또 함께 해 줄 향기로운 얼굴들을 떠올리며 유안진 시인의 글로 새해를 연다.  < 2017년 1월 20일 중앙일보 이 아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