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자전거
오늘따라 24Hr Fitness 홀이 텅 비었다. 하늘은 갑자기 쑥 올라가 버렸고, 땅 속 깊이 머물던 바람이 몽땅 올라와 나무 가지를 흔들고 구름을 흔들고 세워둔 차들도 마구 흔들어댄다. 사람들은 기계 위에 까지 올라가 흔들리고 싶지 않은지 예전 같으면 왁자할 시간인데도 오늘은 조용하다.
어머니가 먼저 오셨을까? 창문으로 수영장을 들여다보니 아직 모습이 안 보인다. 알록달록 꽃무늬 수영복을 입고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어머니 대신 빼빼 마른 한국 남자와 머리에 고무 모자를 눌러쓴 백인 할머니만 풍덩거릴 뿐이다. 노인복지관에서 오는 버스가 조금 늦나 보다.
먼저 들어가서 수영하고 있을 양으로 풀장으로 향한 좁은 복도를 걸어가는데 어디서 “희야”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왼쪽은 선전 문구가 얼룩덜룩 붙은 벽이고 오른쪽으로는 운동 기구방 인데 어디서 들리는 소리인지 모르겠다. “여기! 여기!” 목소리가 더 커진다. 두리번거리는 내 시야에 운동기구 헬스자전거 위에 앉아 계시는 어머니가 들어온다. 빨간 구두에 긴치마. 가로세로 버버리 고유의 체크무늬가 어머니 허벅지 위에서 둔하게 펄럭인다. 아무도 없는 어둡고 휑한 방. 갖가지 운동기구들이 무겁게 침묵하고 있는 방에서 어머니는 무엇을 보셨을까. 장난스레 웃으며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건너편 자전거에 나도 걸터앉았다.
수영장으로 가다가 자전거가 보이길래 어릴 적 생각이 나서 들어오셨단다. “나도 옛날에 자전거 많이 탔다.” 그 시절에 여자가 자전거를 탔다는 말이 믿기지 않아 빙시레 쳐다보니 어머니는 어느 새 열일곱 향긋한 소녀로 돌아가 있다. 막내 동생을 앞자리에 앉히고 뒤에는 짐을 실은 채 강변을 달리던 씩씩한 시절도 있었노라며 얼굴에 살며시 행복한 미소가 번진다. 누나를 따라다니던 동생들도, 참 예쁘다는 칭찬을 해 주던 동네 어른들도, 자전거를 날렵하게 몰던 모습도 선명하게 눈에 보이는지 철커덩 철커덩 어머니의 자전거가 점점 빨라진다. 아직도 가슴 속에 살아 있는 앳된 소녀가 얼마나 그리우면 어두컴컴한 방 낯선 기계 위에 혼자 앉아 이렇게 페달을 돌리실까. 어머니의 모습이 갑자기 부옇게 흐려진다.
<사람이 고향이다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