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빼장구의 자기 위안 / 곽흥렬
남의 신체적 약점을 꼬집어 내어 괴롭히는 사람이 있다. 이거야말로 그 어떤 행위보다 비열한 짓이 아닐 수 없다. 마음의 위축감을 불러오는 일차적 요인이 바로 이 신체에서 연유하는 까닭이다.
나는 어릴 적부터 또래의 아이들에 비해 눈에 띄게 몸이 약했다. 오죽했으면 하늘 높은 줄만 알고 땅 넓은 줄은 모르는 아이라고 어머니가 생전에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을까. 당신께서도 아마 그런 아들이 늘 분에 차지 않으셨으리라.
지금도 전혀 변한 게 없다. 빼빼 마르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다. 내 몸무게는 나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 이건 심지어 아내에게조차 발설하지 않는 나만의 특급 비밀이다. 기를 쓰고 감추고 싶어 하는 나의 은폐 심리를 아내는 묵시적으로 알아차리고 있기에, 억지로 들추어내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굳이 밝히려 들자면, 징병검사 때 현역 입영 대상이 되느냐 마느냐의 분기점에서 체중계의 무게 중심이 약간 가벼운 쪽으로 기운 탓에 현역병으로 가지 않고 보충역 생활을 했다면 대강은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런 나를 두고 또래의 아이들은 “빼빼장~구, 빼빼장~구” 하면서 놀려댔다. 동네 놀이터에서건 학교 운동장에서건 실습실 뒷마당에서건, 나만 눈에 띄었다 하면 찰거머리처럼 붙어 다니며 불러대던 그 별명이 어린 마음엔 정말이지 죽기보다 싫었다. 왜 다른 아이들에 비하여 유난스레 몸이 약해 이 같은 놀림을 받아야 하나. 그렇게 낳아 주신 부모님이 어떨 땐 너무 원망스러웠다.
인간사란 새옹지마처럼 변전무상變轉無常하다 했던가. 세월이 흐르면서 세상은 그새 많이도 바뀌었고, 사람들의 관념도 그 흐름의 양만큼이나 따라 변했다. 영양 과잉상태가 되어 하늘 높은 줄은 모르고 땅 넓은 줄만 아는 뚱보가 지천으로 널려 있고, 그 숫자 또한 하루가 다르게 늘어간다. 이런 상황에서, 빼빼 마른 사람은 이제 날씬한 몸매를 지녔다며 남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게 되었다.
이 땅의 백성들이 지지리도 가난해서 보릿고개에 허덕이던 지난 시절, 뚱뚱함은 부의 상징이었고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때는 아랫배가 얼마나 불거져 나왔는가의 정도가 가진 것의 잣대가 되었는가 하면, 또한 인격의 기준처럼 여겨졌었다.
요새 사람들은 내남없이 살 빼기에 목을 매고 있다. ‘살과의 전쟁’이라는 말이 별반 낯설지 않다. 젊은 여자들 세계에선 말라깽이들이 외려 선망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지 오래다. 군살을 출렁거리거나 똥배로 상체가 드러누운 사람들은 자기 관리에 게으른 미련한 족속으로 눈총받기 일쑤이다.
의학적으로 들여다볼 때 비만은 여러 가지로 문제가 된다. 심근경색이니 뇌졸중이니 고혈압이니 당뇨니 하는, 이른바 대부분의 현대병은 이 비만과 직․간접으로 연관이 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살진 것이 필시 자랑거리는 아닐 성싶다.
무릇 그 어떠한 존재이든 생명 가진 것은 살아감의 과정에서 어차피 일정량의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인간 역시 그에 예외일 수는 없다. 이때 한 개체가 일생 동안 소비하는 에너지의 총량은 거의 일정하다고 알려져 있다. 아무래도 몸집이 크면 그만큼 많이 먹어야 하고, 먹은 것을 소화시켜 내자면 또 그만큼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할 수밖에 없다. 어머니는 내가 어렸을 적에 덤불이 커야 도깨비가 나온다며 입버릇처럼 말씀하셨고, 아내는 이를 소형차 대형차 이론으로 곧잘 빗대곤 한다. 세상 그 무엇이든 일정한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거기에 합당한 내용이 따르게 마련이며, 경차는 대형차 꽁무니에서 기름 냄새만 맡아도 움직이지만 대형차는 천하없어도 기름을 많이 먹어야 굴러간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도깨비 이야기나 아내의 자동차 이론도, 따지고 들면 충분히 나름의 근거를 갖고 있는 셈이 아닌가. 따라서, 몸집이 우람한 사람은 왜소한 사람에 비해 대개 그만큼 단명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일본 스모 선수들의 경우가 이 이론의 명쾌한 뒷받침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의 평균 체중은 자그마치 200킬로그램을 오르내린다. 정상 체중을 지닌 일본인의 평균 수명이 80세를 훌쩍 넘어서는 데 반해, 스모 선수의 평균 수명은 쉰이 채 되지 않는다는 통계 수치를 어느 일간지 기사記事에서 본 적이 있다. 백수白壽를 넘기며 장수하는 시골 할머니들의 대부분이 소쿠리에 담으면 한 소쿠리도 안 될 만큼의 왜소한 몸집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도 이 이론의 충실한 근거가 될 수 있으리라. 나 역시 ‘빼빼장구’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몸집이 호리호리하니 오래 살기는 떼어 놓은 당상이 아닌가. 이렇게 스스로 마른 체형에 대한 위안을 삼는다. 그렇다고 마르고 닳도록 살아야겠다는 부질없는 욕망을 부리고픈 마음은 솔직히 눈곱만치도 없다. 자연의 이법理法 따라 머물다 때가 되면 미련 없이 떠나면 그만이지, 뭘 그리 오래 머물겠다고 안달을 할 일인가.
절집에서의 참선 수행 가운데 ‘안거’라는 것이 있다. 겨울 석 달, 여름 석 달 동안 ‘동안거冬安居’, ‘하안거夏安居’라 이름하여 각각 아흔 날씩 동안 일절 바깥출입을 삼간 채 도량 내에서 용맹정진하는 풍습이다. 동안거야 기후조건에서나 먹을거리 해결 면에서나 나다니며 수행을 하기에는 적절치 않으므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손 치더라도, 하안거는 사뭇 그 의미가 다르다.
겨우내 꽁꽁 얼어붙었던 날씨가 풀리고 대지에 생기가 돌기 시작하면, 뭇 생명체의 바깥나들이도 그에 따라 빈번해진다. 겨울잠에서 기지개를 켜는 동물들이야 말할 나위도 없겠지만, 우리가 무심코 발 딛고 다니는 땅 위에도 무수한 목숨붙이들이 저마다의 분주한 생명 활동으로 다시 맞은 축복의 계절을 구가謳歌한다.
거리를 나다니다 보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연약한 생명체들을 밟아 뭉개는 수가 있다. 이는 곧장 그 목숨붙이들의 죽음으로 이어지고, 본의는 아니지만 어쨌거나 결과적으로 살생이 되고 마는 셈이다. 모르고 저지른 죄가 알고 행한 죄보다 더 무겁다고 설해 놓은『밀린다왕문경』의 가르침대로라면, 이게 얼마나 큰 죄업인가. 그러기에, 따지고 보면 하안거는 부지중의 살생도 금하려는 지고한 원력願力의 자비행인 것이다.
나는 내 몸무게가 채 팔십 근이 아니 됨을 이때는 무척 다행으로 여긴다. 그 애처로운 미물微物들이 뚱뚱한 사람의 발에 밟히면 무참히 짓이겨져 그 자리에서 생을 마감하고 말 터이지만, 말라깽이인 나의 체중에 눌려서는 설사 중상은 입을지언정 적어도 황천길만은 면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커다란 자비행慈悲行을 실천할 수 있게끔 나는 생래적으로 부름을 받고 태어났는지도 모르겠다.
이 세상에 하나같이 뚱보들로 득시글거린다면 글쎄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상상만 해도 벌써 숨부터 가빠 온다. 하루가 다르게 가중되는 스트레스를 지구는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고 끝내 폭발해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식량 문제만 놓고 보아도 그렇다. 뚱보로 가득한 세상은 가뜩이나 여유가 없는 먹을거리 문제를 더욱 심각한 지경으로 만들 개연성이 농후하다. 나 같은 약골은 뚱보의 채 반, 아니 반의반 정도도 먹지 않는다. 많이 먹는다는 것은 인연법因緣法으로 들여다보면 크나큰 죄악이다. 응당 다른 사람에게 돌아갈 몫인데 자신이 그걸 말없이 빼앗고 있는 셈이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하며, 나는 내 몸무게의 가벼움에 스스로 위안을 삼고 오늘 하루도 뜻있게 살아가리라 마음먹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