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춤, 그 너머로 / 엄현옥

 

아침 8시 무렵, 엘리베이터는 자주 멈춰 선다. 등교와 출근이 맞물리는 시간이다. 마음에 여유가 있을 때면 그 좁은 사각의 공간에서 마주치는 아이들이 귀하게 느껴진다. 눈인사로는 부족해 “몇 학년이니?” 하고 말을 건네기도 한다. 물론 예민한 아이들의 눈치를 살피는 것은 필수다. 하지만 마음이 급할 때면, 아이가 타자마자 본능적으로 ‘닫힘’ 버튼을 누른다. 이미 속도에 길들여진 것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아파트 후문으로 달린다. 정해진 시간의 버스를 놓치면, 용산행 급행전철도 놓치게 된다. 버스에 가까스로 앉아, 시간의 바다에 휩쓸려 하루라는 항해를 시작한다.

 

도시는 달린다. 아침이면 사람들은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속도를 높인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부터 시작된 속도전은 보행 신호를 기다리는 횡단보도, 버스 정류장, 지하철 플랫폼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압박 속에 하루를 시작하며 자신도 모르게 방향을 잃는다. 나 역시 정해진 시간에 늦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갈피를 잃곤 한다. 오랫동안 나만의 속도에 익숙해졌다고 믿었지만, 달라진 일상 앞에서 나는 자주 혼란스럽다. 그럴 때면 문득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로 가는가?”

 

이렇게 반복되는 일상 속 작은 멈춤은 더 큰 질문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 질문을 되살린 건, 영화 《이사, Moving》(1993)였다.

 

“더 이상 달리지 않아도 돼.”

 

그것은 영화의 주인공 소녀에게 내가 보낸 메시지였지만, 동시에 지금의 나에게, 그리고 이 사회의, 달리는 모든 이들에게 건네는 말이었다.

 

《이사》는 일본 감독 소마이 신지의 영화다. 1993년 개봉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30여 년이 지난 지금 디지털로 복원되어 다시 조명을 받았다. 영화가 세월을 건너 관객의 마음을 뒤흔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단지 향수 때문이 아니다. 영화는 한 아이가 겪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통해 존재론적 질문을 던졌다.

 

오프닝 장면은 인상적이다. 폭우가 쏟아지는 밤, 삼각형 식탁을 중심으로 앉은 가족의 모습은 가족 해체의 징후를 드러낸다. 정제된 미장센으로써의 식탁은 함께 앉아있지만 정서적으로는 멀어진 관계를 의미한다. 식탁 위에 놓인 것은 저녁 식사를 위한 음식이 아니라 무너져가는 가족 관계와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이다.

 

주인공 ‘렌’은 어린 나이에 부모의 이혼이라는 사건을 겪게 된다. 아이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정신적 거처를 잃게 된다. 혼란과 슬픔 속에서 자신만의 내면의 여정을 시작한다. ‘렌’은 불안함을 잊으려는 듯 계속 달린다. 그것은 단순한 신체적 움직임이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항거이자 불안함을 발산하는 몸짓이다. 숲을 헤매고, 화장실에 숨고, 불빛 가득한 축제 속을 떠도는 ‘렌’의 모습은 롱 테이크long take로 이어지며,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전한다.

 

영화 후반, ‘렌’은 부모의 재결합을 희망하며 여행을 계획한다. 그러나 여행지에서도 사소한 말다툼으로 어긋나고 ‘렌’의 바람은 수포로 돌아간다. 절망한 아이는 축제 거리를 헤매다 무의식 속 환영을 본다. 물속으로 사라지는 부모를 향한 ‘렌’의 울부짖음은 이별의 수용이자 성장의 출발점이다.

 

마침내 렌은 더 이상 환영을 붙잡지 않는다. 비로소 자신의 슬픔과 화해한 아이는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달리지 않는다. 여전히 진행 중인 부모의 이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까지 성장한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혼잣말처럼 내뱉는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는 자신의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한 아이가 보내는 축사이자, 온몸으로 겪어낸 시간에 대한 감사였다.

 

소마이 신지 감독은 아이의 불안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말을 던지는 대신 이미지와 공간의 감각으로 감정을 전달한다. 철학자 들뢰즈Gilles Deleuze가 말했듯, 인간은 고정된 정체성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 ‘되어가는 존재’다. ‘렌’은 부모의 이혼이라는 사건 앞에서 더 이상 아이일 수 없다는 깨달음을 통해 스스로 질문하는 주체로 성장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렌’의 질문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물음으로 확장된다.

 

영화 속 달리기는 아이의 진심에 귀 기울이지 않는 부모를 향한 아이의 몸부림이자, 이 사회의 자화상이다. 멈추면 그들의 이혼을 받아들여야 할 것 같은 불안함에서 아이는 달리고 달린다. 우리 또한 진심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속도를 잃지 않기 위해 앞만 보며 달린 것이다.

 

하루에도 핸드폰 알림이 수없이 울리고, 일상은 속도 경주처럼 흘러간다. 멈추면 도태될 것 같은 불안감 때문인지 현대인은 늘 무언가를 향해 달린다. 유발 하라리 Yuval Noah Harari는 《멈출 수 없는 우리》에서 인류가 기술과 진보에 매달리는 이유를 선택이 아닌 생존의 조건이라 말한다. 그가 그려낸 미래는 속도에 중독된 현대인의 모습과 겹친다.

 

속도가 인간의 행복과 존엄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우리는 더 빠르게 정보를 소비하고, 효율적으로 일하는 만큼 성찰의 시간은 줄어든다. 자신의 감정조차 읽을 겨를이 없다. 비록 속도에 편승했을지라도 왜 그래야 하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속도를 늦추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진정한 진보는 그저 달리는 것이 아니라, 가야 할 방향을 알고 멈출 수 있는 힘에서 시작된다. 사회적 상상력은 우리가 현재를 넘어서 다른 삶의 방식과 질서를 상상할 수 있도록 해주는 힘이다. 개인의 멈춤이 모이면, 사회의 리듬도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작년 이맘때 나는 정년을 맞았다. 35년 간 몸담았던 직장을 떠나는 일은 생각보다 큰 심리적 전환이었다. 매일 반복되던 업무에서 벗어나, 스스로 채워가야만 하는 시간 속으로 들어선 것이다. 나는 자유로워졌다고 믿었지만 여태껏 속도를 조절하지 못한 채 달리고 있다. 그것은 목적 없는 압박이며 공백의 불안함을 메우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누군가의 정체성이 새롭게 정립되는 과정은 혼란스럽고 고통스럽다. 그렇다면 나의 불안은 당연한 것이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흔들리고 변하는 유동적인 존재다. 이 흔들림을 두려워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성숙이며 변화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속도로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 그 여정 속에서 때로는 멈추고 물어야 한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으며, 어떤 존재로 되어가고 있는가?”

 

‘렌’이 환영 속에서 자신의 어제를 떠나보냈듯, 나도 이제 달리지 않기로 했다. 느리게, 천천히, 나의 보폭대로 걸어가기로 한 것이다. 무작정 달리던 지점에서 멈춰 돌아보면, 비로소 보이는 내면의 풍경이 있다. 삶의 전환기란, 단지 ‘이동’이 아니라 ‘방향’을 새롭게 사유하는 일이다.

 

영화가 끝났지만, 나는 곧장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흐르는 생각을 붙들기 위해 극장의 로비에 조용히 앉았다. 그 순간, 누군가 내 등을 조심스럽게 토닥여주는 듯한 느낌이 스며들었다. 그때 깨달았다. 지금 나는 ‘이사’ 중이라는 사실을. 단지 공간의 이동이 아니라, 삶의 궤도를 바꾸는 이사 말이다. 영화관을 나서며 나를 향한 독백을 삼켰다.

 

“더 이상, 달리지 않아도 돼.”

 

그것은 속도를 늦추기로 한 마라토너에게 보내는 조용한 축사였고, 삶의 다음 장을 여는 선언이었다. 그제야 나는 알게 되었다. 나의 삶도, 비로소 ‘멈춤, 그 너머’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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