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와 수필가 / 박동조

 

 

칠순의 남자가 나무를 빗는다. 조각칼로 깎아내고 끌로 쫀다. 아파트의 좁은 베란다가 그의 작업실이다.

전생에 그는 사람이 아니고 딱따구리였을 것이다. 창문으로 몰려드는 따가운 여름의 햇살도, 한 겨울의 추위도 마다않고 나무를 쪼니 기막혀 그런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바라보는 나는‘저러다 병이 재발하는 건 아닌가!’늘 조마조마하다. 오랜 기간 백혈병의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난 지 일 년 만에 심장에 스탠드시술을 받은 사람이다. 자주, 와락 달려들어 조각도를 뺏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때마다, 조각하는 순간이 행복하다는, 조각하다 그 자리서 숨지는 것이 소원이라는 주문처럼 들어온 말이 손을 붙든다. 외진 주택이라면 잠도 자지 않고 나무를 빚을 사람이다. 도리 없이 파르르 일던 충동은 저 혼자 마음속에서 부대끼다 짚불처럼 슬그머니 잦아들고 만다.

조각에 기울이는 열정이 못마땅했던 시절이 있었다. 돈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가장의 취미는 본분에서 벗어난 곁눈질로 여겨졌다. 그러다 큰 병을 치르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다. ‘인생의 저물녘에 오롯이 자신을 바칠 수 있는 자신만의 세계가 있다는 건 축복이다.’라고 생각을 바꾸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렇다고 건강에 대한 걱정까지 사라진 건 아니다. 작업에 혼신이 빠져 있는 그를 잠시나마 쉬게 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다. 나는 그에게 바깥소식을 물어 나르는 새와 같은 존재다.

“여보! 웃기는 얘기해 줄까?”

‘웃기는’이라는 사동사는 조각에 열중하는 팽팽한 그의 시간을 자르는 면도날일 뿐, 웃기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이야기라는 게, 그날의 모임에서 있었던 일, 운전하다 겪은 이야기, 시장에서 느낀 그날의 물가 같은, 남자는 몰라도 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그는 조각에서 눈을 떼고 머리와 손을 쉰다. 나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채 달리는 남자를 잠시나마 쉬게 했다는 안도감을 대가로 챙긴다.

밤이 되면 상황이 바뀐다. 남자가 낮 동안의 피로를 덜고 있을 때 나는 컴퓨터 앞에서 글을 짓겠다고 머리를 쥐어짠다. 그런다고 신통한 글을 얻는 것도 아니다. 나물 씻다 시간 다 보내는 서툰 요리사처럼 문장 하나 들고 주물럭거리다 말기 일쑤다.

이럴 때는 글 판에 발을 들인 것이 후회스럽다. 겁 없이 들어선 문학의 세계는 만만하지 않았다. 끊임없는 창작욕과 열정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글을 얻기가 언감생심이었다. 모자라는 낱말과 메마른 감성을 다 된 치약처럼 짜내어 쓴 글은 내가 읽어봐도 어설프다.

미명이 드리운 서늘한 새벽에 책상 앞에 앉아 생사를 해탈한 글을 쓰는, 우아하게 주름진 내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그럴듯한 상상은 잠에서 깨어나면 사라지는 꿈과도 같았다. 해탈은커녕 시간이 흐를수록 글 쓰는 일이 무서워졌다. 그럴수록 자신의 일에 몰입하는 그가 부럽다. 어떻게 해야 저 사람처럼 남의 시선에 아랑곳없이 글에만 헌신할 수 있을까가 나의 화두다.

내게도 글 쓰는 일이 행복했던 시간이 있었다. 글쓰기에 몰입되어 날이 밝는지도 몰랐던 그때는 머릿속에 그려지는 생각을 시간이 지나도 문장으로 옮길 수 있었다.

어찌 된 셈인지 이즈음은 생각을 옮기려고 컴퓨터 앞에 앉으면 머리가 하얘진다. 나는 그것을 나이 탓으로 핑계를 댄다. 젊음을 앗아간 시간이란 괴물이 기억력과 집중력을 먹어 치운 것도 모자라 어휘의 곳간을 다 털어갔다고 한탄한다.

남자는 모니터 앞에서 붓방아나 찧고 있는 나를 그럴듯한 글이라도 쓰는 줄 안다. 방해라도 될까, 발뒤꿈치를 들고 걷는가 하면 텔레비전은 무음으로 시청한다. 그럴수록 나는 글 변비가 심해진다. 안 그래도 된다고 말해 보지만, 남자는 못 들은 척한다.

아주 가끔 누가 불러주는 것처럼 글이 써질 때가 있다. 남자는 이때를 용케도 안다. 과일을 챙겨와 쉬어가며 하라고 친절을 부린다. 웃기는 이야기를 곁들이는 것도 잊지 않는다. 글을 쓴답시고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인터넷 서핑으로 시간을 보낸 내게는 인터넷에서 건져온 내용이 대부분인 이야기가 새로울 게 없다. 그래도 시침 뚝 떼고 손뼉을 쳐가며 재미있다고, 진짜 웃긴다고, 딴전 피운 무렴함을 얼러방친다.

그 순간부터 글쓰기는 ‘멈춤’에 든다. 나는 장구 나무라는 선무당처럼 남자가 원망스럽다. 그것도 잠시, 컴퓨터를 벗어날 구실을 얻은 것에 쾌재를 부른다.

나는 그가 빚은 조각품의 첫 관람자고, 그는 내가 쓴 글의 첫 번째 독자다. 그간의 노고를 알기에 ‘엄지 척’으로 서로를 응원한다. 덕분에 버름했던 사이가 동지처럼 가까워졌다. 추구하는 장르는 다르나 창작에서 오는 고민의 무게는 어금버금하다.

다행스레 우리는 한쪽 눈을 감고 서로를 보는 재주를 가졌다. 마흔다섯 해 동안의 자신을 버리는 연마 덕분이다. 한쪽 눈을 감으니 마음을 복작이게 하는 상대편의 티끌이 보이지 않는 기적이 일어났다. 기운 떨어져 허청거릴 저문 인생길에서 서로를 연민하는 눈이 생겨 그나마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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