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맛 / 허정진
봄동 같은 맛이다. 한겨울 찬바람에도 꿋꿋이 자라나 겨우내 움츠렸던 속을 풀어주는 봄 내음이다. 달짝지근하면서도 상큼하고 시척지근하면서도 개운하다. 거북 등껍질처럼 말라버린 논에 물 들어가는 소리이고, 울컥했던 마음 저 끝자락의 설움들이 살갑게 녹아내린 온기이다. 아기가 본능적으로 엄마 품을 파고드는 유대감이며 더 이상 더하거나 뺄 것도 없는 투명하고 순백한 편안함이다. 마라톤 결승점을 통과한 고통과 인내 뒤의 희열이고, 품 안에 알을 깨워 겨드랑이 날개를 키우는 어미 새의 희생과 열정 뒤에 보람이기도 하다.
밥맛이나 입맛은 신체적인 반응이지만 살맛은 가슴에서 스며 나오는 내재적인 감정이다. 겉치레가 아니기에 소란스럽거나 눈부시거나 화려하지 않아도 되고, 돈이나 명예나 지위같이 사람 구분 짓는 잣대에 구애받지 않아도 된다. 속마음에 들어있는 자산들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고 공평하게 주어지는 법, 살맛 또한 남이 아닌 자기만의 가치이고 남이 인정 여부와는 상관없는 자신만의 기쁨이다.
살맛은 곧 행복감이다. 세상 살아가는 재미나 의욕이고, 엔도르핀이고 아드레날린이다. 고생 끝에 낙(樂)이며 천변만화 끝에 실(實)이다. 콧노래나 은은한 미소 같은 기분,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여유와 너그러움을 가진 긍정의 에너지다. 인생이라는 게 얼마나 힘들고 고단했으면 산다는 것은 결국 살아내는 일이라고 어느 시인이 말했을까. 말이 없어도 저 혼자 피어나는 꽃처럼 어떻게 보면 마음먹기에 달린 일이어서 누구나 가슴 저편에 희망의 꽃을 피우고 사는지도 모른다.
살맛은 특정인이거나, 주연이고 중심에만 주어지는 특혜가 아니다. 다 갖추고 살면서도 한숨 소리뿐인 사람도 있고 평생을 농투성이로 살아도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풍족한 마음으로 사는 사람도 있다. 작고 사소한 일에도, 무용지용처럼 쓸모없는 것 같은 데서도 순간의 감동이나 기쁨의 샘물이 생성되는 경우도 많다. 장미보다 안개꽃 같은, 수평선 낙조의 둥근 해보다 주변에서 더 붉게 불타오르는 노을처럼 누구에게나 주인공의 자리를 열어두고 있다.
살맛은 부지불식간에 나타난다. 자의식이나 가족관계에서, 일의 성취감을 통해서도 수시로 그 실체를 드러낸다. 맑았다 흐렸다 하는 것이 장삼이사의 일상이고,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이 망석중이의 심중이다. 희로애락이란 것이 밀물처럼 밀려왔다가도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이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감정이란 아메바는 처지나 상황에 따라 술빵처럼 부풀어 오르기도 하고 고무풍선 바람 빠지듯 순식간에 쪼그라들기도 한다.
살맛은커녕 평생 죽을 맛으로 살았다. 야생에 던져진 초식동물처럼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포식자들의 눈치를 살피거나, 먹고 산다는 그 날것의 고통과 준엄함에 멧돼지처럼 생존의 코를 벌렁거리며 허기진 냄새를 쫓아다닌 것도 사실이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세상에 뭐가 그리 부족하고 억울하고 서운한 게 많았던지, 뭐가 그리 부럽고 질투 나고 속상한 일이 많았던지 가슴 한가운데 강박증과 화닥증을 습관처럼 몸에 달고 살았다. 정작 자신은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살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며 미움과 분노로 홀로 피폐해져갔다. 오늘에 만족하지 못한 삶은 허울 좋은 이력서 한 장 제대로 완성하지도 못한 채 매번 허우렁에 빠지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 일쑤였다. 내 집에 살면서도 여인숙처럼 마음의 짐을 다 풀어놓지 못하고 발편잠 한번 자지 못한 삶이었다.
성격 탓도 있었다. 완벽주의를 내세우며 모든 일에 근심 걱정거리가 떠나지 않았다. 소심하고 낯가리는 데다가 생각이 많고 예민해서 조바심이나 의구심도 심했다. 말수도 적고 너울가지도 없어 하소연이나 감정표현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혼자가 편했다. 함께 하는 공동체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공감대를 형성하기보다는 각자의 삶이 존중되기를 바라며 경계선을 긋기 일쑤였다.
그러면서도 남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는 강했다. 인간의 심리는 인정받고자 하는 오이디푸스 적 관계이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자아와 존재감의 주체적 대상이 아니었다. 줄을 세우고 크기를 비교하고 높낮이를 따지고 드는 세상의 상대적 기준으로 누가 나를 알아봐 주고 부러워해 주기만을 기대한 것이 문제였다. 겉으로는 자주성을 외치면서도 속으로는 세상에서 혹시 열외당할까 봐 발버둥 친 셈이었다. 남과의 비교는 끝이 없었고 결국 만족이 없는 미련과 아쉬움은 정작 살아있으나 죽은 것과 같은 삶일 뿐이었다.
삶이 아름다운 것은 사람 인(人)자처럼 서로의 어깨를 내어주고 의지해서 살기 때문일 것이다. 먹이를 발견한 사슴이 동료들과 함께 먹자고 내는 울음소리인 녹명(鹿鳴)이나, 함께 손을 잡고 달리기를 하는 코샤어의 우분투(Ubuntu)나 모두 살맛 나는 세상의 표본이다. 장애인을 채용한 가게 주인은 그것은 단순히 취직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에 눈부신 날개를 달아준 것과 마찬가지이다. 나로 인해 누군가를 살맛 나게 만든다는 것이 그만큼 귀하고 아름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글학교에 다니는 어느 할머니가 글을 깨치니까 세상의 어두운 동굴에서 빠져나온 것 같아 살맛이 난다고 했다. 글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죄지은 사람처럼 침묵하고 움츠러들었던 자괴감이 얼마나 한이 되었으면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싶다. 천진난만한 아기의 웃음보다 세상에 더한 평화로움이 없고, 장성한 자식과 소주 한잔 나누며 삶의 얘기를 전하는 것보다 더 큰 뿌듯함과 자랑스러움도 없을 것 같다. 어쩌면 누군가를 책임질 일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살맛을 만드는 일이 아닐까 싶다.
살맛 나는 요즘이다. 나이가 들었다거나 은퇴를 해서 몸과 마음도 해방되어서가 아니다. 무엇보다 그동안 남이 인정하고 칭찬받는 사람으로 존재하던 태도를 버리고 내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 덕분이다. 더 이상 남과 비교도 불필요해지고, 무엇에 매달려 연연해하지도 않고, 굳이 필요하지도 않은 일에 욕심부리지도 않는다. 꽃이 피면 마음이 설레고, 바람이 불면 졸래졸래 쫓아가고 싶다. 그래, 사는 게 이런 맛이지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