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에 안긴 어머니 / 이난영

 

 

골반을 다쳐 8년 동안 편찮으셨던 어머님이 혼자 운명하실까 봐 더듬이처럼 촉수를 곧추세웠다. 보름 동안 날밤을 새웠더니 다리를 주무르는데 졸음이 쏟아져 머리가 끄덕끄덕 곤두박질쳐졌다. 시계를 보니 11시 50분이다. 내려앉는 눈꺼풀을 손으로 밀어 올리며, “어머니! 저 눈이 자꾸 감겨요. 자도 될까요?” 하고, 여쭈었다. 저녁에 목욕시킬 때만 해도 이상 없었는데 말문이 닫힌 듯 대답을 못 하시고, 회광반조 현상이 나타났다. 생명의 해가 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남편과 아들을 깨우고, 준비했던 한복을 입히는데, 손은 떨리고 어머니 몸은 점점 굳어가고 있어 제대로 입힐 수가 없었다. 간신히 속옷과 속치마를 갈아입히고, 버선까지 신겨드리고는 마지막으로 분홍색 치마저고리를 입혀드렸다. 새색시처럼 선연했다. 품에 안으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이승의 번뇌를 해탈한 듯 염화미소 지으며, 0시 13분에 자는 듯 가셨다.

  할머님의 오랜 치매로 온 가족, 특히 어머니는 긴장의 나날을 보냈다. 할머님이 90세에 영면에 들자, 대추방망이처럼 야무지단 소리를 듣던 어머님은 탈진증후군에 시달렸다. 다행히 78세에 바느질로 우울증을 극복하고, 인생 2막을 시작하셨다. 봉사활동을 하며 아름다운 노후를 보내던 중, 82세에 골반을 다쳤다. 정신은 또렷한데 옴짝달싹 못 하시니, 애절초절함은 뭐라 말할 수 없었다. 몇 개월 입원 치료하였으나 조금의 차도도 없으니 의사 선생님은 큰일을 대비하란다. 속울음을 삼키며 집으로 모셔 왔다.

  현관에 들어서자, 표정이 밝아지셨다. 하지만, 해가 서산에 기울 듯 시나브로 쇠잔해지셨다. 갖은 정성 다해도 백약이 무효였다. 어머님은 청주의 대갓집 규수가 시골 가난한 선비를 만나 지난한 삶을 사셨다. 선비인 아버님을 대신해 집안일과 들일을 도맡아 하며, 삯바느질까지 하셨다고 한다. 허리띠를 졸라매면서도 60∼70년대 시골에서는 보기 드물게 아들들을 대학교에 보낸 현모이시다. 빚은 물려받았으나 그런 어머님을 위해 우리는 평생 어머님 뜻을 어기지 않고, ‘안갚음’에 최선을 다했으나 아픔과 죽음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삶의 마지막을 “한 세상 잘 살았노라. 행복했노라.” 웃으며 가실 수 있도록, 선녀처럼 고운 모습으로 보내드리기로 했다. 화사한 분홍색 실크 한복을 채비하여 머리맡에 놓으며, 어머니는 우리의 우주였다고 말씀드렸다. 내 손을 꼭 잡으며 “타고난 맏며느리였다.”고, 고마워하시는데 눈물이 앞을 가렸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양한방 치료를 병행하였다. 알 수 없는 힘의 작용인지, 양방과 한방의 융합이 효험을 보인 것인지, 옴짝달싹 못 하던 몸이 조금씩 움직였다. 머리맡에 두었던 한복을 신줏단지 모시듯 장롱 속에 넣어 두었다. 2년이 지나자, 보행 보조기에 의지하고 화장실 출입이 가능해졌다. 앉은뱅이처럼 누워서 저승 문을 들어설 수 없다는 어머님의 굳은 의지가 기적을 만들어냈지, 싶다. 8년이란 세월이 흐르고, 아들, 딸, 손주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90세의 생신상을 받으셨다. 보고 싶은 자손들을 모두 보았기 때문일까. 기력이 급격히 떨어지셨다. 어둠의 그림자를 쫓아내려 고수련해도 소용이 없다. 장롱 속에 깊숙이 보관하던 한복을 꺼내 머리맡에 놓으며, 제 품에 안겨서 가셔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맏며느리를 끔찍이도 사랑하시던 어머님은 내 품에 안겨서 꿈을 꾸는 듯 먼 여행을 떠나셨다. 인생 소풍 끝내는 모습이 천사처럼 고왔다. 팔 년을 누워계셨는데도 천명을 다하셨기 때문일까. 너무도 평온한 모습에 슬픔은 안도로 바뀌었다. 병원에 도착하니 이렇게 고운 옷 입고 가시는 분은 처음 본다며, 복인이라고 추어준다. 장례를 마치고 옷을 정리하는데 회한의 눈물이 쏟아졌다. 비읍하여 어머님의 삶이 오롯이 배어있는 모시 치마저고리와 염주, 그리고 수계증을 보관했다. 유품을 볼 때마다 이승의 인연을 내려놓고, 새처럼 바람처럼 훨훨 날아가고 싶은데, 내가 붙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면서도 20년을 보관했다.

  지난해 말, 삶과 죽음은 별개가 아니라 나란히 같이 걸어간다는 것을 터득할 정도로 가까운 친인척과 지인들의 애석한 소식을 자주 접했다. 특히 나보다 여덟 살이나 어린 동서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다. 하여, 나도 주변 정리의 필요성을 느꼈다. 어머니 옷이 고민되었다. 아들에게 대물림할 수도 없고, 재활용함에 넣자니 죄스러웠다. 고심 끝에 충북대학교 박물관에 문의했다. 흔쾌히 가져오란다. 모시 치마저고리와 수계증을 상에 올려놓고 큰절을 올리고, 박물관으로 가져갔다. 박물관에 안착하기를 기도하면서 돌아오는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니 하얀 나비 한 마리가 나풀나풀 춤을 추고 있다. 어머님을 대하듯 한참을 바라보았다.

  모시옷을 기증한 지 100일째 되는 날 궁금하여 박물관에 전화했다. 보존 가치가 있다고 한다. 어머니의 체취가 배어있는 모시옷이 박물관에 안긴 것이다. 안도와 감사함으로 수화기를 내려놓는 손이 사르르 떨렸다. 꽃잎 떨어져도 향기가 남아 있듯 어머님이 우리 곁을 떠나신 지 오래되었지만, 그 향기는 영원히 가슴속에 남아있다. 인자하고 부드러운 숨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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