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지색에 대하여 / 정성화

 가을이면 다시 보고 싶어지는 영화가 있다. 험프리 보가트와 잉그릿드 버그만이 주연한 '카사블랑카'다.

사랑하는 여인을 독일군 점령지에서 서방 세계로 탈출시키면서 정작 자신은 사지死地에 남는 라스트 신이 인상적인 영화다. 쓸쓸한 밤 공항, 여자는 그녀 남편과 함께 비행기에 오르고, 남자는 그 두 사람을 전송한다. 어둠 속으로 서서히 사라지는 비행기와 혼자 남게 되는 사나이, 그리고 비에 젖는 그 버버리 코트, 깃을 바짝 세운 그 버버리 코트에는,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반드시 사랑하는 여인을 지키겠다는 한 남자의 결의가 들어 있다. 그 영화를 본 뒤로, 남자 옷 중 가장 멋있는 옷은 버버리 코트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베이지색을 좋아하게 되었다.

화장을 하지 않은 민얼굴을 닮은 색, 나무 속살을 닮은 색이 바로 베이지색이다. 베이지색은 나무와 모래와 낙엽을 섞어서 만든 색일지도 모른다. 베이지색 옷을 입고 있으면, 나무에 기대어 있는 듯 편안하고, 바닷가 모래밭을 거니는 듯 느긋해지며, 잎이 떨어져 있는 길에 서 있는 듯 마음이 고즈넉해지니 말이다.

은하 빛을 다 모으면 청록색이 아니라 베이지색이 된다는 연구 결과를 보았다. 생명을 길러 내는 우주이니만큼, 차가운 청색보다는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이 드는 베이지색에 둘러싸여 있는 게 어울린다. 그래서인지 우리 주변 자연에는 베이지색과 갈색이 많은 편이다. 우리가 발을 디디고 서 있는 땅이 안정감을 주는 베이지색이라는 게 참 다행이다. 만일 나무 색이 검은색이라면, 나무를 바라보는 우리 마음이 얼마나 어두울까. 만일 모래가 붉은색이라면, 바닷가 모래사장에 서 있다가 흥분한 나머지 바닷물로 뛰어들지도 모른다. 신의 색채 감각은 역시 놀랍다.

베이지와 갈색은 식욕을 자극하는 색이기도 하다. 갓 구운 빵과 그 빵을 담아둔 바구니 색, 고슬고슬하게 지어놓은 현미밥 색, 당도가 한층 높아졌을 때 바나나 껍질에 생기는 반점 색이기도 하다. 생명이 있는 것들은 어쩌면 그 색에 끌려 자신의 먹을거리를 찾아 나서는 게 아닐까.

프랑스 작가이면서 <뒷모습> 저자인 '미셸 투르니에' 글에 나오는 구절이다.

"TV프로에 나가게 되었다. 심사숙고한 끝에 편안한 느낌이 드는 옷을 입기로 마음먹었다. 베이지색 코르덴 재킷에 녹색 터틀넥 스웨터, 그리고 갈색 바지, 다시 말해서 나무, 부식토, 엽록소 분위기를 연출하기로 한 것이다.

멋스러운 미의식이다. 글이란 것도 결국은 작가가 가진 미학에서 출발하는 것, 그 글이 왜 그리 풋풋하고 싱그러운지 이 글을 읽으면서 의문이 풀렸다.

색은 시각적 이미지라 소리보다 빨리 전달된다. 그래서 인기 있는 드라마에는 대개 절묘한 색의 조화가 나온다. 드라마 '겨울연가'도 마찬가지다. 순수했던 지난날을 추억하게 하는 눈雪의 흰색, 겨울 하늘색이면서 여주인공의 머플러 색이기도 한 파란색, 그리고 남자 주인공의 코트 색이면서 희망을 상징하는 베이지색. 이 세 가지 색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며 드라마는 전개된다. 그중 베이지색은 남자 주인공 표정을 더욱 온화하게 보이도록 하며, 삭막한 겨울 풍경에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고 있다. 가슴을 졸이다가도 그가 베이지색 코트를 입고 나오면 왠지 상황이 나빠지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곤 했다.

베이지색은 오랜 친구 같은 색이다. 떨어진 눈물자국을 얼른 숨겨주는 색이면서 너른 품을 가진 색이다. 다른 색과 어울렸을 때는 다른 색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색이기도 하다. 베이지색을 바탕으로 가로 세로 선을 치면 멋진 체크무늬가 탄생하고 또 베이지색 바탕 위에 점을 찍으면 분위기 있는 물방울무늬 스카프가 생기기도 한다. 나에게 베이지색이 되어준 친구들을 잠시 떠올려 본다. 나는 그들에게 어떤 색이었을까.

베이지색에 유난히 마음이 끌리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다. 잘 익은 곡식만이 지닐 수 있는 색이라는 점이다. 누렇게 익은 벼와 조, 들녘에 고소함을 풀어놓고 있는 콩이며 참깨, 들깨, 그리고 땅콩 등, 내 속도 그런 색으로 잘 여물어 가야 할 텐데.... 내 삶의 가을은 이미 다가오고 있는데, 내 속은 아직 여물어 가는 기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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