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여지뱅듸 / 이명진

 

 

눈이 내린다. 흰 눈이 내린다. 목화솜을 닮은 함박눈이 내린다. 눈송이는 제 무게를 못 이겨 낙화를 서두르다 차분차분 항아리 위로, 소나무 가지 위로, 막 피어난 수선화 꽃잎 위로 날아와 쌓인다. 소복소복 두께를 이룬 하얀 눈송이의 결정체는 소리가 없다. 그들이 만든 별천지는 아름답게 빛을 뿜어낸다.

스물아홉 해밖에 살지 못한 아들을 보내기 위해 그녀는 눈발을 맞으며 안간힘 썼다. 을씨년스런 교차로에서 심정지 상태로 병원까지 이송된 아들이었다. 그의 몸뚱이가 허공에서 맴을 도는 듯 눈송이가 흩어졌다 모였다 곡예를 한다. 그곳이 어디일까. 넓디넓은 벌판이 보인다. 언뜻 마른 억새가 춤을 춘다. 네모나게 둘러쳐진 산담(무덤의 제주어) 사이로 작은 봉분이 바람맞이를 하고 있다. 훤칠하게 큰 키에 덩치가 육중한 젊은 남자의 모습이 눈부시게 들판을 가로질러 달려온다.

‘미여지뱅듸’란 이승과 저승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을 의미한다. 망자가 저승으로 갈 때 꼭 거쳐 간다고 믿는 곳이며, 무속에서 사용해 온 제주어로 알려져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허허로운 벌판 한가운데를 헤매며 떠돌고 있는 작은 아들을 위해 그녀가 할 일은 천도재 밖에 없다고 했다. 흐린 하늘에서 쏟아지는 눈발을 머금고 사찰 경내로 들어서는 그녀의 뒷모습이 너무 작고 초라해 보였다. 빨강 노랑 파랑 하양으로 치장한 탱화가 그녀의 속마음과 닮았을까. 자꾸 시선을 끈다. 찬란한 빛깔의 기운이 부처님 닮은 자비인 양 포근하다. 뎅그렁 목어의 울림 속으로 작아진 어미 몸뚱이가 휘청휘청 빨려 들어갔다.

제주도 어느 곳과 인연을 마주했을까. 온통 현무암 투성이 뿐인 제주에서 아들을 위한 천도재를 올리게 될 줄 어찌 알 수 있었겠는가. 탐라의 섬사람들은 아기가 태어나면 탯줄을 불태워 아무도 모르는 땅에 묻었다. 섬사람에게 땅은 자신들 탯줄을 묻은 시원의 터이며, 생명수를 갈구하는 본향인 셈이다. 하지만 육지에서 자라 죽음을 맞이한 아들에게 제주는 낮선 터일 수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보내며 정을 쌓아 둔 곳이 아니었지만, 그녀의 소망은 간절했다. 미여지뱅듸 어느 귀퉁이를 서성일 아들에게 제주의 시간과 땅과 바람을 기억시켜 주고 싶어 했다.

그녀의 남편이 세상 떠나기 전 처음으로 가족 여행을 왔던 제주였다. 끝없이 펼쳐진 벌판에서 뛰어다니며 좋아하던 아이의 천진스런 모습을 잊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남편을 교통사고로 잃고 힘들어할 때 삶의 의미를 알려준 아들이었다. 영정 속 아들은 가장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억새밭에서 웃고 있었다. 양팔을 벌리고 하늘을 향해 주먹질을 하고 있는 아이의 표정은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사람은 태어나면 언젠가는 죽는다. 이승은 우리가 태어나 경험할 수 있는 사랑, 고통, 기쁨, 슬픔 등 복잡한 감정과 관계 맺고 있다. 삶의 의미는 개인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사람은 타인과의 관계와 성취감과 자기 발견을 통해 성장하지 않던가. 죽음이 어떻게 다가오는지에 대한 의문은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엄마의 새벽잠을 깨울까 살금살금 일터로 나섰던 아들이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오자 억척스럽게 살던 그녀도 쓰러지고 말았다. 이른 아침, 배웅 못 한 아들의 얼굴이 생각나지 않아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며 한숨을 흘렸다. 말과 달리 흐느낌도 없이 눈물방울은 떼굴떼굴 볼을 타고 입술에 멈춰 서서 투명함을 잃었다. 밥 때가 되면 언제나 전화로 안부를 묻던 싹싹한 아들이었다. 저녁이면 제 몸도 피곤할 터인데 어미 어깨를 주무르며 아양을 떨던 막내 아니던가. 손 잡고 싶어도 잡히지 않는 환영 속 애달픔을 향해 목탁 소리가 빙빙 맴 돈다. 아들의 그림자가 나타날 듯 말 듯 간절한 어미 소망이 허공을 갈랐다. “아들이 머물고 있는 공간은 따뜻하긴 할까.” 그녀는 살아있으면서도 죽은 자와 같은 울림 없는 저음으로 중얼거렸다.

저승은 인간에게 가장 큰 미지의 영역이다. 죽음은 모든 생명의 끝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시작으로 여겨질 수 있지 않을까. 여러 종교에서는 죽음 이후를 구천이나 천국이나 극락 등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믿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삶을 더욱 의미 있게 살아가도록 힘을 실어준다. 그녀의 망연함을 눈치 챘을까. ‘천도재’를 시작하며 스님은 조근조근 오늘 의식에 대해 설명하지 않던가.

영혼을 올바른 길로 인도한다는 뜻인 ‘천도재’는 불교 의식을 말한다. 천도재 역시 49재와 마찬가지로 유교식 제사의 제(祭)를 써서 흔히 ‘천도제’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이는 망자가 사후의 고통에서 벗어나 극락왕생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수행하는 의식이다. 고인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달하는 법식을 베풀어, 생전 업도 씻고 미련과 원한까지 풀어주기 위해 산 사람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응원인 셈이다.

고인의 명복을 빌며 마음의 평안도 찾고, 공덕까지 쌓아 자신을 성찰하고,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스님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왔을까. 그녀의 양어깨가 들썩이다 요동친다. 큰소리로 통곡하는 울음소리가 넓은 법당 안을 돌다 귓전을 때렸다. 제단에 놓인 쌀과 과일과 나물에 망자의 손길이 닿았을까. 스님의 낭랑한 독경 소리에 맞춰 간절히 명복을 비는 행위가 애절하다. 부처님을 휘감는 경전의 의미에 영혼이 응답이라도 하듯 여기저기 걸쳐 놓은 지전이 마구 흔들렸다. 아득한 미지의 세계에서 갈 곳을 찾은 걸까. 환한 빛이 대웅전을 향해 걸어 들어온다.

이제 그녀의 아들은 나비가 되어 미여지뱅듸를 떠날 채비를 하고 있으려나. 자연으로 돌아갔으니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 누릴 수 있는 마지막 행운을 만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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