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두루마기 / 허세욱
먼 하늘 빈 들에 한두 마리 백로가 훨훨 난다. 백로는 옷소매에 흰 구름을 묻히고 끽끽 외마디 소리를 저쪽 시냇물에 떨구더니만 갑자기 방향을 잃은 듯 맴을 돈다. 꼬불꼬불한 논두렁을 따라 이제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처럼 서툴게 배회하더니만 지친 듯 서산 소나무에 걸터앉는다.
내가 어렸을 적 나들이 가신 아빠를 기다리느라 동구 밖 우물가에 서 있으면 그때도 두루미는 큰 원을 그리면서 아랫마을 긴긴 무논을 맴돌았다. 고사리 손길로 눈등을 부비다가 흰 자락을 보면 헐레벌떡 뛰어갔었다. 그때마다 그 흰 두루마기는 틀림없는 우리 아빠였었다. 마중 나온 자식을 덥석 껴안기는커녕 반겨하는 한 마디의 말도 건네주지 않았다. 그 크막한 조끼 주머니에서 손가락 과자 하나 주기는커녕 내 손목을 잡아 주지도 않았다.
무논 위에 두루미가 아직 배회할 때, 수척했지만 육척 장구이신 아빠 뒤를 종종걸음치며 사랑채 마당을 들어서는 것이다. 철은 없었지만 하얀 두루마기를 보면, 매달려 보고 싶은 어리광보다는 어딘지 옷깃을 여미고픈 일말의 엄숙을 느꼈고 그 엄숙함이 나에겐 든든하였다.
아빠가 자리를 비울 때면 나는 장롱을 열고 그 흰 두루마기를 보았다. 그 긴긴 옷자락에선 우람한 소나무를 보듯 나는 두 팔을 벌리고 으스러지게 껴안고 싶었다.
풍덩한 소매, 치렁한 자락, 너울너울한 옷고름. 거기에 빳빳이 풀 먹인 깃. 이리저리 제치다 보면 이것을 강바람에 띄우면 돛대가 되겠고, 하늘에 띄우면 비행기 날개라도 삼을 것 같았다.
진달래 꽃비 오는 골짜구니를 뚫고 유유히 흐를 수도 있겠고 흰 구름 만학천봉을 밟으며 은하수 나루터에 별을 낚을 수도 있겠구나 했다.
내가 나이를 꽤 훔쳐먹은 뒤, 바다를 건너는 비행기 위에서도 이런 생각은 버리지 못했다. 이럴 때 아버지의 두루마기를 입었더라면 설혹 불의의 일이 벌어진들 나만은 직선의 추락이 아니라 훨훨 날아서 어느 무인도에라도 유유히 착륙하리라고…….
아버님의 흰 두루마기는 그렇게 우람한 소나무처럼 든든하였고 그렇게 표표히 나부끼는 흰 구름처럼 시원스러웠다. 그래서 그것은 엄부(嚴父)의 상징이었고 속박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 현해(懸解)의 상징이었다.
하얀 옷자락엔 하늘의 구름이 묻어 있었고 하얀 깃엔 하늘로 솟구치는 기운을 갊아 두었고, 거기 하얀 옷고름은 어쩌면 선녀의 섬섬옥수를 닮느라 될수록 길게 길게 늘어뜨린 게 아닐까.
어쩌다 파고다 공원 앞을 지나게 된다. 하얀 두루마기에 지팡이를 짚고 금방 콧물이 톰방 떨어질 듯한 노인 한 분이 공원 현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몰래 그 옆에 섰다. 노인은 현판을 읽고 나는 노인의 눈망울을 읽는 것이다.
나는 또 다시 저 빈 하늘 끝에서 그 목소리를 듣는 거다. 그 목소리는 어쩌면 해 저물 무렵 소나무로 돌아가던 백로의 외마디 같은 것이다. 그때, 비록 개관(蓋棺)을 하느라 온 방이 쨍쨍 울리도록 못을 박았지만, 입혀드린 하얀 두루마기로 하마 먼먼 나라 먼먼 하늘을 가셨겠지.
서산 너머로 날아간 머리 흰 두루미처럼 지금쯤 어느 소나무 높은 가지에서 이슬을 따먹고 계실지. 그러다가 백학이 되는 날도 있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