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 허정진

 

저 멀리 만록(萬綠)의 나뭇가지가 바람에 가만히 흔들린다. 세든 옥탑방에 가만히 현관문이 열리고 고향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낯선 표정의 한 사내가 나타난다. 널평상 위에 입주한 고요가 등걸잠에 빠져들 때 오후 햇살 받아먹는 빨래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가만히 말라간다. 나비 한 마리 물끄러미 바라보던 고양이가 무심한 듯 다가와 허공을 툭, 앞발로 가만히 건드려본다. 내려다보이는 골목길에 어린 소녀가 훌쩍이고 어디선가 나타난 친구가 가만히 손을 잡아준다. 들창 아래 틈새에 피어난 한 송이 금계국을 보며 옛 연인처럼 가만히 불러보는 이름이다. 사내의 눈길이 가는 곳마다 스톱모션에 걸린 시계처럼 세상은 잠시 멈췄다가 가만히 다시 움직인다. 나도 너도, 모두 가만가만히 존재한다.
 

‘가만히’는 천천히도, 느리게도 아니다. 움직이지 않거나 아무 말 없이, 그냥 그대로, 마음을 가다듬어 곰곰이, 그게 원뜻이다. 소리보다는 양태에 익숙하고 위엄보다는 포용에 더 어울리는 말이다. 동구 밖 마중 나온 할머니 따뜻한 품이 그랬고, 십우도처럼 송아지를 잃고 난 뒤 평상심으로 돌아온 어미 소의 투명한 동공이 그랬다. 음과 음 사이에 최대한 정적을 사용하는 거문고 연주법이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은 존 케이지의 <4분 33초>의 침묵과 같은 것이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힘과 울림은 크고 오래가는 단어다.
 

말의 느낌이 곱고 단아하다. 아지랑이 타고 봄이 오는 소리 같고 깊은 산속 샘물에 방울지는 작은 동심원의 파동 같다. 제대로 발음하려면 입을 살며시 벌린 채 메아리처럼 공명하는 여음을 들어야 하는 말본새다. 아무 데나 편하게 가져다 쓰는 부사어지만 함부로 다루기에는 조용하고 조심스럽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도 갈 수 있고, 가만히 있으니까 가마니로 보이냐는 말이다.
 

혼자 살아서 그런지, 내성적인 성격 탓인지 일상생활이 차분하고 신중한 편이다. 모든 일에 시간을 두고 골똘하게 생각하고 천천히 실행에 옮기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느리지는 않지만 서두르지도 않는다. 약속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빠듯하게 움직이는 것보다는 일찌감치 도착해서 한껏 여유를 부리는 식이다. 말하기보다는 듣는 것에 익숙하고, 나서기보다는 지켜보는 것이 마음 편하다.
 

나이 든 이유도 한몫한다. 젊었을 때처럼 록클라이밍이나 스쿠버다이빙 취미는 엄두도 내지 못한다. 생활 주변에서도 안전이 보장되지 않은 시설이거나 불안정한 조건이나 상황은 멀찌감치 피한다. 무서워졌다기보다는 자신감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아무리 힘들고 위험한 일이라도 젊음이 뭐든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제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한다. 행동이나 처신이 더 신중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막연한 불안과 공포를 가질수록 할 수 있는 일이 상대적으로 적어져 간다.
 

한때는 가만히 있지 못하던 시절도 있었다. 대지도론(大智度論)의 비유처럼 성급한 마음, 불쑥대는 생각들 때문에 중심도 없이 덤벙대느라 허구렁에 빠지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 일쑤였다. 조금만 참거나 조금만 기다렸으면 좋았을 것을, 만패불청(萬覇不聽)은커녕 조금만 기분이 상하고 조금만 상처를 입으면 울뚝불뚝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리곤 했다. 아직도 자존심이나 자괴감 운운하며 제대로 환영받고 대접받지 못한다는 상실감에 버럭버럭 화를 내는 것을 보면 젊어서나 늙어서나 여전한 것은 그 조급한 성질머리인 것 같다.
 

인간관계가 누구 한 사람의 노력과 욕심만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닌 것 같다. 정이나 의가 좋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서로 헐뜯고 비방하는 사이가 되기도 하는 것이 일상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서 보면 그 이유나 원인이란 것이 서로 간에 잘못된 오해에서 비롯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미 낯을 붉히고 서로 흉한 모습을 보고 난 터, 그 교감의 시간을 기다리지 못한 후회가 막심할 뿐이다.
 

남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었다. 가만히 참아내는 일이 지는 것 같고 손해 보는 것 같지만 세상은 겪어봐야 이해하게 되는 법, 때가 되면 억울하거나 섭섭한 일도 저절로 비밀의 열쇠는 풀리게 되어있었다. 세상은 아무런 주문을 하지 않았는데도 아기는 걸음마를 하고, 꽃은 혼자 피고, 파도는 쉼 없이 너울져온다.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면 주르륵 흘러 없어져 버리고 마는 것 같지만 콩나물은 소리 없이 자라고 있다. 가만히 있는다는 것은 무심한 듯하지만 결국은 문제를 해결하는 완전한 계획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산다는 것이 뫼비우스의 띠와 같았다. 겉이 안이 되고 안이 겉이 되기도 하고, 세상사는 돌고 돌아 결국은 제자리로 돌아오는 과정이었다. 착한 사람에게도 적은 있고 악한 사람에게도 추종하는 사람은 있게 마련인 것이 결국 세상이었다. 말없이 곁에만 있어도 정겨운 사람이 있고 아무리 웃고 떠들어도 불편한 사람은 있는 법이었다. 사람마다 얼굴이 다른 것처럼 그 다양성을 인정하고 다름을 존중하는 마음을 진작 받아들였더라면 훨씬 삶이 부드럽고 자유롭지 않았을까 싶다.
 

살면서 힘든 고비가 많았다. 가장으로서 밥줄을 구걸해야 할 때도 있었고, 불의나 진실 앞에서 입이 묶인 복주머니처럼 침묵을 지켜야 하는 일도 있었다. 빈털터리로 길바닥에 나앉게 되었을 때는 외딴섬에 동떨어졌거나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누군가의 현명한 조언이나 뜨끈한 국밥 같은 위로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말 없는 안부며, 젖어있는 눈빛이나 어깨에 올린 손의 온기 정도면 충분했다. 사람도 알처럼 품고 있으면 언젠가 부화되리라 상상하면서 내 편이 등 뒤에 있는 것처럼,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 사람들이 있어 얼마나 든든했는지 모른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어쩌면 가만히 지켜보고 기다려준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싶다.
 

딸애가 서너 살 때쯤이었다. 어느 날 퇴근하고 지친 몸으로 집에 들어왔더니 아무 말 없이 내 손바닥을 끌어당겨 가만히 자기 볼을 감쌌다. 왜 그러냐고 물어도 아무 대꾸도 없이 그 동작을 반복했다. 진지하고 심각한 딸애의 행동에 나도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었는데 시간은 유연하고 마음은 평화로웠다. 한참을 그러고는 아버지란 존재에 대해 무슨 확신이라도 가졌다 싶었는지 안심하며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낮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혼자서 어떤 상상의 나래라도 펼쳤나 궁금했다. 마흔 중반에 이른 딸이지만 이제라도 그 이유를 새삼 물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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