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연꽃의 눈 / 맹난자
일본 작가 나츠메 소세키의 만년처럼 요즘 나도 거실 창밖 유리문 안에 갇혀 지낸다. 계절의 순환을 그저 바깥 풍경에나 의지한다. 기척 없던 나무에 연둣빛이 감돌더니 목련꽃이 만개했다. 생명으로 눈부신 봄, 우리 부부는 거실과 안방에서 불편한 호흡으로 이 봄을 건너고 있다. 약봉지를 찢어 그의 손바닥에 수북이 올려주면 “이렇게 오래 살게 해서 무얼 해?” 콧줄에 의지하고 있는 지아비의 말에 대꾸할 말조차 옹색하다.
요즘 내 가슴속에서도 누군가 가느다란 실로 현絃을 켜는 것처럼 작은 풀벌레 소리가 난다. ‘꾸꾸’ 할 때도 있고 명부에서 보내는 타전인가 하다가 개의치 않기로 한다. 활짝 핀 목련 꽃잎들이 뒤틀린 사지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저렇게는 되지 말아야 할 텐데….
내가 해야 할 일은 90세의 환자를 선종善終으로 배웅하고, 이 몸도 낙화落花하는 일이다.
오늘따라 늘 그 자리에 있었건만 잊고 지냈던 거실 좌측 벽면의 액자가 눈길을 붙잡는다.
‘유마불이문維摩不二門’
50여 년 전에 은사 김구용 선생께서 써주신 글귀이다. 거기에 김동화 선생님의 차분한 음성도 실려 온다. ‘생사즉 열반’ ‘번뇌즉 보리’. 《금강경》 강의를 마치고 선생께서 택한 교재가 《유마경》이었다. 《유 마경》은 《금강경》처럼 반야부의 일부로 선생께서는 당시 대학생 연극에 몰두한 나를 배려하신 듯 이 경전이 극적 구성으로 되었음을 몇 번씩이나 강조하셨다.
책이 귀하던 1965년, 광우 스님께 책을 빌려와 사무실에서 가리방으로 긁어 등사판 인쇄로 일요일 아침마다 가져갔건만 귀에 남은 것은 ‘생사즉 열반’ ‘번뇌즉 보리〔지혜〕’가 둘이 아니라는 불이不二의 말 씀이었다. 생사生死 따로, 열반涅槃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 둘이 ‘즉卽 해 있다는 것을 알아라’ 넌지시 말씀하시는 것 같다.
생사불이不二, 생사일여一如. 거기에 머물러 있던 내 관점이 오늘은 왜 그 ‘즉卽’ 자에 휘감겨 드는지 알 수 없다.
번뇌를 떠나 보리[지혜]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 둘이 즉卽해 있다는 것. 생사와 열반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서로 함께한다는 것은 파도가 물을 떠난 적이 없듯 ‘생사와 열반이 상공화相共和’라는 말씀[법성게〕이 아닌가. 파도의 현상이 곧 바닷물의 본질이요, 현상과 본질이 등배지간이듯 파도와 바닷물은 둘이 아니다. 분단分段 생사하는 우리의 현상이 곧 열반적정涅槃寂靜이요, 본질이라는 그 관계성을 더듬어 보게 된다.
저 목련나무의 꽃이 다 떨어진 날, 나무는 다시 한가한 평정심에 들리라. 나 또한 그렇게 하리라. 모든 존재는 연기緣起이므로 실체가 없는 공空이다. 그러나 인연으로 발생한 현상으로서의 존재는 유有가 아닌가. 있으면서 없는 ‘색즉시공色卽是空’이요, 없으면서 있는 ‘공즉시색 空卽是色’이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그 ‘즉卽’에 비유非有와 비무非無, 진공묘유眞空妙有를 깨닫는다. 현상과 본질, 생사와 열반, 이 둘이 서로 맞물려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대립과 모순이 기실은 하나 라는 그것이 궁극적 진리가 아닐까 한다. 무아無我에서 진아眞我를 생각하게 된다.
김동화 선생님 댁으로 《신행불교》 원고를 받으러 간 어느 날, 선생님께서는 내게 불명을 내려주셨다. 《실상묘법연화경實相妙法蓮華經》 에서 따와 ‘실상實相’이라고 하셨다. ‘실상’은 있는 그대로의 타타타 tathātā, 진여眞如를 말함이다. 《연화경蓮華經》의 연꽃은 꽃과 열매를 동시에 품고 있는 화과동시花果同時다. 원인과 결과가 동시에 있다. 마치 임신한 여인의 태胎 속에 이미 죽음이 싹트고 있는 것처럼, 생과 사가 즉卽해 있다. 모양이 변했지만, 그 본질은 그대로 있다.
후설3)을 빌려오자면 그것은 본질을 드러내는 ‘형상적形相的 환원’이 다. 그 연꽃의 화과동시는 음과 양을 한 몸에 지닌 듯하다. 생사라는 것도 기실 음과 양의 대대처럼 보이나 그것들은 서로 꼬리를 품고 있는 부음이포양負陰而抱陽4)인 것이다.
일태극太極 안의 음양처럼 그것들은 대립이 아닌, 모순과 대립을 초월한 ‘상공화相共和’, 그 상보성이 생사生死의 본질이 아닐까도 싶다. 오래전 내게 역易을 가르쳐 주신 노석老石 유충엽 선생이 지어주신 호는 관여觀如다. 모든 존재의 여여如如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관觀하라는 ‘관여’. 이 또한 ‘실상實相’과 다르지 않은 동의어다. 두 분 선생님의 심장深臟한 의중을 짐작해 본다.
무슨 인연일까. 우리 어머니 이름은 김묘연妙蓮. 김구용 선생은 ‘백화시실白華詩室’ 주인의 당체當體이시다. 관여, 실상實相은 흰 연꽃의 눈. 그 이슬방울에서 생과 사의 즉卽을 본다. 나 이제 그만 공기空氣 속으로 돌아갔으면 한다
3) 후설: 독일의 현상학 철학자(1859~1938)
4)부음이포양負陰而抱陽: 음을 등에 지고 양을 안은 태극의 형상
